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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담긴 세상

[고규홍의 나무생각] 나무 심는 마음으로 나라를 일으키다

by 광주일보 2021.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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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새 나라를 일으키겠다는 마음을 다진 이성계(李成桂, 1335~1408, 재위 1392∼1398)는 하늘을 바라보며 나무를 심었다. 20대의 청년 이성계는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개경을 탈환하는 위업을 비롯해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며 승승장구했다. 무예가 뛰어난 그는 특히 활 솜씨가 뛰어나 ‘신궁’(神弓)이라는 칭호를 얻으며, 역사상 최강의 공격형 장수로 이름을 떨쳤다.

운이 다한 고려를 뒤엎을 꿈을 꾸던 세력들은 자연히 이성계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인맥뿐만 아니라 경제력 또한 만만치 않았던 이성계는 귀족 출신이 아닌 데다 변방 세력이었다. 그가 기존의 세력을 뒤엎고 새 나라를 일으킨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생명까지 내던져야 할 만큼 위험한 도전이었다. 고민은 깊었다.

이성계는 조선 팔도를 유람하며 건국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를 올렸고 건국의 채비에 공을 들였다. 그리고 그는 나무를 심었다. 하늘의 뜻에 따라 삶과 죽음이 갈리는 나무처럼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맹세의 상징이었다.

전북 진안 마이산의 아늑한 절집 ‘은수사’ 경내에 서 있는 청실배나무가 그 가운데 한 그루다. 말(馬)의 귀(耳)를 닮은 마이산(馬耳山) 자락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은수사 경내에 서 있는 이 청실배나무는 백일기도를 올린 이성계가 손수 심은 씨앗이 싹을 틔운 나무다.

이성계는 꿈속에서 선인으로부터 ‘이 나라 땅을 헤아려 보라’는 말과 함께 금으로 된 자(金尺)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마이산을 지나면서 꿈속에서 선인으로부터 금척을 받았던 곳과 똑같은 형태의 마이산을 보고 놀랐다. 이성계는 곧바로 마이산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나라를 세울 꿈을 차근차근 키워 갔다.

그때 절집의 샘물을 떠 마신 이성계는 물이 은(銀)처럼 맑다 하여 절집에 ‘은수사’(銀水寺)란 이름을 붙였다. 그는 개국의 꿈을 키웠고 열렬한 마음으로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모든 계획을 치밀하게 마무리하고 기도를 마친 뒤, 그는 자신이 머무르던 요사채 앞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모든 걸 하늘에 맡기겠다는 ‘진인사대천명’의 다짐이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는 ‘진안 은수사 청실배나무’는 높이 15m, 가슴 높이 둘레는 2.5m나 되는 큰 나무다. 줄기는 어른 키보다 좀 위에서 넷으로 갈라져 곧게 솟아오르다가 사방으로 고르게 14m까지 가지를 펼쳤다. 나무는 조선 개국의 전설을 품은 영산(靈山) 마이산의 상징으로 남았다.

이성계는 마이산 은수사뿐만 아니라 이 땅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땅의 기운을 얻기 위해 더 많은 곳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올렸다. 전남 담양 대치리 한재초등학교의 느티나무도 건국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이성계의 소망이 담긴 나무다. 이 자리에서도 마이산 은수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기도를 마친 그는 나무를 심었다.

국가 운명을 쥐락펴락하겠다는 사람들의 뉴스가 잇달아 뉴스의 톱으로 올라온다. 그러나 국가와 국민을 위해 그들이 내놓는 계획은 도무지 미덥지 않다. 대관절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종작없이 떠도는 ‘아무 말 잔치’가 천연덕스럽게 펼쳐진다.

20대의 젊은 시절부터 풍전등화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이성계는 나라의 사정이 목숨을 바쳐서 지켜야 할 만큼 온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썩어 가는 나라의 운명을 바로잡겠다고 마음을 다졌지만, 결코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주변에 몰려드는 군중의 환호성에 결코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직수굿이 하늘의 뜻을 살피고, 한 그루의 나무를 심으며, 새 나라 건설을 착실하게 채비했다. 오래도록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는 강건한 국가를 이루기 위한 채비는 섣불리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그는 잘 알았다. 나무처럼 천천히 그러나 더 강건하게 이어 갈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내다보는 지도자의 지혜가 아쉬운 시절이다.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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