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누아르·모네·피카소···20명 예술가 명화 속으로
인상주의에서 모더니즘까지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
뒤뷔시·라벨·홀리데이 등 거장 음악 또 하나의 '작품'
전시장에 들어서자 귀에 익숙한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의 아리아가 울려 퍼진다. 가로 100m, 세로 50m의 블랙 캔버스에는 마치 음악을 물감으로 풀어 놓은 듯한 리듬감 넘치는 그림들이 하나 둘씩 등장한다. 음악가이자 화가였던 독일 출신의 화가 파울 클레의 작품들이 화면에 떠오르자 여기 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10분 가량의 기획 프로그램 ‘파울 클레-음악을 그리다’전은 제목 그대로 파울 클레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 음악과 어우러져 색다른 감흥을 선사한다. 어린아이같은 클레의 작품들을 보니 ‘마술피리’의 마법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
하지만 오페라의 무대는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대신 그 뒤를 이어 환상적인 색채의 향연이 전시장의 벽과 바닥을 화려하게 물들인다. 아방가르드 음악의 푸가에 맞춰 추상과 구상의 작품들이 번갈아 가며 광란의 리듬을 펼친다. 특히 강렬한 노란색의 ‘황금물고기’(1925년 작)가 전시장의 벽을 타고 유영을 하는 모습은 압권이다.
지난달, ‘지중해로의 여행’이라는 근사한 타이틀로 인상파 거장들과 모더니즘 화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제주 빛의 벙커를 찾았다. 100만 명의 누적관람객을 동원한 ‘빛의 벙커:클림트전’과 ‘반 고흐’에 이은 이번 전시는 클로드 모네, 르누아르, 샤갈을 주축으로 피사로, 시냑, 블라맹크, 뒤피, 드랭 등 인상주의와 모더니즘 시기에 활동했던 화가들의 그림 500여 점을 어둠 속 빛의 언어로 풀어낸 현장이었다.
지난 2019년 첫번째로 선보인 클림트전이 ‘색채’, 2020년의 두번째 ‘반 고흐’전이 강렬한 붓터치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 세번째 전시는 영감의 원천인 지중해 풍광과 웅장한 음악이 관점 포인트다. 말 그대로 거장의 예술을 ‘눈과 귀’로 즐길 수 있는 미디어아트의 연회다.
관람객들은 어두운 벙커 안을 자유롭게 거닐며 모네와 르누아르 등 불멸의 화가들의 명작을 한편의 파노라마처럼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린다. 빛의 벙커는 90여 개의 빔프로젝터에서 나오는 영상물이 넓이 3000㎡(900평)의 전시공간에 순식간에 떠오르다가 사라지고, 다시 떠오르기를 반복한다. 벙커 내부를 떠받치는 27개의 기둥은 입체감을 살리고, 70여 개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감동을 배가시킨다.
전시는 500여 점의 작품을 총 6개의 시퀀스로 나눠 선보인다. 특히 빛과 색채에 대한 영감과 모더니즘의 태동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지중해를 환상적으로 조명한다. 1880년대 지중해의 풍광과 기후에 매료된 유럽의 많은 작가들은 파리와 해협 지역을 떠나 지중해 해안으로 몰려 들었다. 그중에서 모네는 ‘지중해 그룹’의 핵심 주자였다. 빛의 변화를 탐색했던 그는 이 곳에 머물며 빛과 색채를 자신만의 새로운 방법으로 깊게 탐구했다. 모네의 대표작 이자 인상주의 회화의 걸작으로 불리는 ‘수련’과 ‘양산을 쓰고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 여인’은 이번 전시의 아이콘이다. 지하 벙커를 가득 메운 모네의 작품들이 휘몰아치듯 숨가쁘게 펼쳐지는 순간, 관람객들은 마치 블랙홀 속으로 끌려 들어가듯 황홀경에 빠진다.
모네에 이어 등장하는 화가는 오귀스트 르누아르다. 모네와 르누아르는 지중해 리비에라의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돼 함께 머물며 세기의 걸작들을 다수 남겼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중에서 대담한 색채와 명암의 교차가 인상적인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는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내는 ‘신스틸러’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등장하는 작품을 바라다 보면 어느 순간 무도회의 주인공처럼 연회장을 누비는 착각이 든다. 이어 피사로, 시냐크, 드랭, 블라맹크, 뒤피, 샤갈 등 인상주의 부터 점묘파, 입체파, 야수파, 보나르, 뒤피, 샤갈 등 모더니즘 시기의 작품까지 서양 미술사의 걸작들이 40분 동안 펼쳐진다.
이번 전시회의 하이라이트 가운데 하나는 음악 선곡이다. 클로드 뒤뷔시, 모리스 라벨, 조지 거쉰 등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아 서정적인 음악을 작곡한 거장에서부터 빌리 홀리데이, 엘라 피츠제럴드 등 20세기 재즈 아티스트들의 음악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작품’이다.
이번 전시를 주관하는 홍순언 에그피알 대표는 “코로나19로 어려움이 있지만 클림트전과 고흐전을 통해 빛의 벙커가 널리 알려진 덕분에 제주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꼭 가봐야 할 관광명소로 인식되고 있다”면서 “코로나19로 지친 이들을 위해 백신 접종자에게는 20% 할인혜택을 제공하는등 다양한 온·오프라인 힐링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관람객들의 참여를 높이기 위해 이번 전시의 오디오 도슨트로 소설가 김영하, 뮤지컬 배우 카이를 위촉했다. 두 사람이 전하는 화가들의 작품과 창작세계에 대한 흥미로운 해설은 빛의 벙커 공식 홈페이지(www.bunkerdelumieres.com)와 네이버 오디오 클립을 통해 무료로 청취할 수 있다.
이처럼 ‘빛의 벙커’가 몰입형 미디어아트의 전진기지로 부활한 데에는 공간이 지닌 장소성을 빼놓을 수 없다.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에 자리한 ‘빛의 벙커’는 KT가 국가기간통신망을 운영하기 위해 1990년에 설치한 시설로 오랜 세월 외부에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 어둡고 음습했던 벙커가 미디어아트의 발신기지로 빛을 보게 된 건 한국의 (주)티모넷과 프랑스 예술전시통합서비스 회사인 컬처스페이스의 공동프로젝트 덕분이다. 티모넷 측은 민간에 매각된 이 벙커를 10년간 임대하기로 하고 지난 2018년 클림트전을 계기로 아미엑스 상설 전시를 시작하게 된 것.
그중에서 빛의 벙커의 압도적인 스케일은 미디어아트의 최적지로 꼽힌다. 가로 100m, 세로 50m, 외부 높이 10m, 내부 높이 5.5m에 달하는 공간은 관람객들을 판타지의 세계로 이끌기에 충분하다. 특히 외부 소음을 완벽히 차단하는 특성을 가진 벙커 내부의 넓이 1㎡의 기둥 27개는 공간의 깊이감을 살려 준다.
‘빛의 벙커’는 개관 4년 만에 제주의 문화예술 랜드마크로 떠오르며 관광지형도를 바꾸어 놓고 있다. 프랑스 레보드프로방스의 ‘빛의 채석장(Carrieres de Lumieres)’, 파리 ‘빛의 아틀리에’에서만 볼 수 있었던 전시를 둘러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몰려 들고 있는 것이다. 이 전시 프로젝트를 계기로 제주도는 천혜의 자연관광 명소에서 색다른 감동을 선사하는 예술의 섬으로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있다. 전시는 내년 2월28일까지.
/제주=글·사진 박진현 문화선임기자 jh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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