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진은 삶의 소중한 인연들의 기록입니다”
‘찰나의 미학, 사진가는 율동과 인상(印象)의 한 순간을 포착해 낸다. 이은주 사진작가가 40여 년 동안 카메라에 담은 예술가들의 생동하는 혼(魂)은 한 시대의 조명이자 한국 문화예술의 역사이다. 최근 ‘사진인생의 전부’인 필름자료 일체를 아르코 예술기록원에 기증한 작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 예술가 300명 사진자료 예술기록원에 기증 =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사진은 우리의 문화예술 자산입니다. 개인이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만인이 누려야 할 재산이라 생각합니다. 40여년 찍어온 문화예술인들의 모습을 역사와 기록으로 후세에 남겨주고 싶어요.”
이은주(74) 사진작가는 40여 년 동안 촬영한 문화예술인들의 필름과 디지털 파일 등을 정리해 순차적으로 아르코 예술기록원(구 국립 예술자료원)에 기증하고 있다. 기증을 위한 사진파일 정리 작업은 만만하지 않다. 그동안 촬영한 작가별 필름 파일들을 꼼꼼하게 루페로 살펴서 나쁜 컷은 버리고, 좋은 컷을 선별한 후에 손으로 언제, 어디서 열린 공연인지를 손으로 일일이 메모해야 한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초상권 동의를 받는 절차도 빠뜨릴 수 없다. ‘손가락에 쥐가 날 정도로’ 한명한명 연락을 드려 300명의 승낙을 받았다.
당초 이은주 작가와의 인터뷰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진행하기로 약속했으나 ‘사회적 거리두기’의 강화로 부득이 이메일과 전화를 통한 ‘비대면’ 인터뷰로 대신했다.
기증되는 필름·파일에 담긴 문화예술인들과 오피니언 리더들은 모두 300여명. 무용과 음악, 미술, 연극, 국악, 종교, 언론 등 한국 문화예술계를 이끌어온 대표적인 인물들의 ‘젊은 날의 초상’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프로필과 공연사진을 망라한다. 40여년 사진인생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백남준, 법정 스님 등 예술인 인물사진에 열정 쏟아 = 이은주 작가는 1970년대 불모지였던 한국 무용사진에 뛰어들어 현재까지 40여 년간 치열한 작가정신을 갖고 문화현장을 발로 뛰었다. 처음 무용 무대사진으로 시작해 현대무용으로 활동범위를 넓혔으며 음악과 미술, 연극, 종교 등 각 분야 대표적인 문화예술인들의 인물사진을 카메라에 담았다. 20세기 비디오 아트를 창시한 전위예술가 백남준(1932~2006)과 서양화가 천경자(1924~2015), 명무(名舞) 이매방(1927~2015), ‘무소유’ 법정 스님(1932~2010), 피아니스트 백건우·윤정희 부부 등 문화예술계의 독보적인 예술인들과 오랜 시간을 두고 ‘인연’을 이어왔다.
특히 백남준 선생의 경우 15년 동안 서울과 뉴욕을 오가면서 작업 모습은 물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촬영했다. 작가에게 백남준 선생은 “내 인물사진 역사에 정점을 찍으신 분”이다. 한 예술가와 오랜 시간에 걸쳐 교유한다는 것은 더할 수 없는 행복이자 큰 의미로 다가온다. ‘시대의 지성’ 이어령 교수는 2017년 펴낸 작가의 사진집 ‘이은주의 포토 오디세이(Photo Odyssey)’(안나푸르나 刊) 추천사에서 작가의 사진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이은주라는 ‘따뜻한’ 필터를 통해 묘사되는 각 인물들의 모습과 이야기는 참으로 신선하며 뭉클한 감동을 자아낸다. 이은주 님의 사진은 모든 인연들의 역사와 이야기가 담긴 서사시이며 다양한 삶의 빛깔들을 모아 놓은 무지개다. 사진술이 아니라 인생을 관조하는 철학, 그것을 찬미하는 시, 그리고 그것을 분석하는 광학의 과학이다.”
◇ 1981년 국전에서 ‘환희’로 대상 수상해 = 강원도 강릉시가 고향인 이은주 작가는 성균관대 국문학과 재학시절 우연하게 명동 뒷골목 헌책방에서 영국 영화감독이자 사진가인 데이비드 해밀턴(1933~2016)의 발레사진을 보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사진에 입문해 무작정 카메라를 무대에 들이댔지만 뭔가 부족했다. ‘피사체와 사진가 사이의 거리’를 느낀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중앙대 무용과에서 청강을 했다. 또 서울에서 공연되는 무용을 연습과정부터 지켜보며 전반적인 흐름과 하이라이트 장면을 파악했다. 1981년 제30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에 국립 무용단의 ‘허생전’(안무 송범) 군무(群舞)를 역동적으로 포착한 사진 한 점을 출품해 사진부문 대상을 수상, ‘터닝 포인트’를 맞았다. 이를 계기로 예술인들의 사진의뢰가 이어지며 사진세계의 깊이와 폭을 확대할 수 있었다.
이은주 작가에게 1992년은 각별한 해이다. 40여년의 외길 사진인생에 에너지가 된 ‘내 인생의 멘토’ 세 사람을 만났다. 마더 테레사 수녀와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그리고 천경자 화백이다. 테레사 수녀를 만나며 ‘사랑하고, 비우고, 버리고, 봉사하며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배웠다. 천경자 화백은 사진을 시작한 내내 이은주 작가의 ‘롤 모델’이었다. 이은주 작가가 천 화백을 처음 만났을 때 “천 화백을 롤 모델삼아서 사진예술가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자 천 화백은 “신념을 가지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격려했다.
법정 스님 또한 작가에게 많은 정신적 영향을 미쳤다. 작가는 신문칼럼(동아일보 1989년 2월 10일자)을 통해 법정스님과의 일화를 소개한다. 법정 스님은 산사를 찾아온 그에게 “모두들 채우려고만 하지 참으로 비울 줄을 모른다”고 말한다. 작가는 이에 대해 “단 한 장의 사진에도 심혈을 쏟고 싶은 내 욕망,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진을 찍고 싶다는 야심과 그 덧없는 욕망의 극복을 위한 절제 사이의 적정한 경계선을 깊이 생가하게 해주었다”고 했다. 이번 사진인생의 전부라 할 수 있는 필름을 기증하는 것도 법정 스님의 ‘무소유’ 영향이다.
◇ “공연장 나들이는 요즘 내 소소한 즐거움” = 문화현장에서 이은주를 사로잡았던 예술계 거장들은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 이면에 따뜻한 인간미와 예술관, 인생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사진을 매개로 맺게 되는 ‘인연’의 향기는 어느 꽃보다 짙었다.
오래전 ‘건반위의 구도자’로 불리는 피아니스트 백건우 리허설 때 일이다. 무대 위에서 피아노에 근접해 사진을 찍으며 작가는 셔터소리가 연주가를 방해할까 가슴을 졸여야 했다. “셔터소리가 방해되면 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말하자 그는 예상 밖의 답을 했다.
“걱정 마세요. 저에게는 피아노 소리만 들립니다.”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 사진가에게 필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그는 피사체와 사진가 사이의 거리를 없앨 수 있는 ‘신뢰’와 상대 심리를 읽을 수 있는 ‘직관’을 강조한다. 반(半) 심리학자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인물사진을 찍을 때는 상대의 심리를 읽을 수 있는 직관이 필요해요. 신뢰와 교감이 중요하죠. 마음이 통해야 해요 상대의 기분에 따라 작품이 잘 나올 수도, 망할 수도 있습니다.”
작가의 딸(최시내)도 공연사진작가로 어머니의 길을 잇고 있다. 지난 2010년에 어머니는 ‘백남준의 삶과 예술’을 주제로, 딸은 ‘발레리나 강수진의 예술세계’를 주제로 한 ‘모녀전’을 함께 열었다. 이어 2014년에는 공동 작업으로 같은 길을 걷는 가족을 담은 ‘동행 33전’을 마련했다.
요즘 작가의 소소한 즐거움은 공연장 나들이다. 동년배 예술인들의 요청으로 이따금 무대를 촬영하긴 하지만 가벼운 발걸음으로 연주회장을 찾아 객석에서 공연을 감상한다. 카메라와 함께 해온 예술인생 40여년, 그에게 ‘사진’이란 무엇일까?
“사진은 인연입니다. 내가 살면서 만난 가장 소중한 인연들의 기록이 바로 내 사진이기 때문이에요. 20대 시절 나의 등을 두드려주고 싶어요. ‘사진하길 참 잘했다’며….”
/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사진=이은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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