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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람기자(예향)

[굿모닝 예향] 마을 곳곳에 녹아있는 고려인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삶

by 광주일보 2024.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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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동반 시대 ] 월곡동 고려인마을을 가다
1990년대 고려인 한국 들어오며 광주 월곡동에 마을 형성
한국어 서툰 고려인동포 지원 위해 고려인 종합센터 등 오픈
러시아어 등 다국적 간판 즐비한 세계음식문화의 거리 조성
중앙아시아풍 건축·외국 전통복장 벽화 등 이색 풍경 즐비

고려인이 운영하고 있는 음식점은 한국인들도 즐겨찾는다.

광주시 광산구 월곡동에 자리하고 있는 고려인마을 종합지원센터. 센터가 들어서 있는 건물 2층에 올라서자 가정집처럼 따뜻한 온기가 전해진다. 예정에 없던 방문객에 잠시 분주하게 움직이는 듯 보이더니 곧이어 테이블 위에 먹을거리가 하나둘 차려지기 시작한다.

건과류와 건과일부터 빵과 잼, 꽤 무거워 보이는 티팟에 차까지 내어오니 그제서야 자리에 앉는 신조야 센터장. 신 센터장은 사단법인 고려인마을 대표를 맡고 있는 고려인들의 대모(代母)로 불린다.

“제가 태어나고 자랐던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이런 게 문화였어요. 손님이 오면 이렇게 빵이나 음식들을 내놓고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거죠. 따듯한 홍차 한잔 드시면 바깥 추위도 다 날아갈 거에요.”

신조야 대표는 23년 전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고려인 3세대다. ‘고려인’은 일제 때 연해주로 간 사람들을 일컫는다. 당시 만주로 간 사람들은 조선족, 연해주로 간 사람들은 고려인이라 부른다.

일제시대인 1860년 무렵부터 해방 전까지 농업이민, 항일독립운동, 강제동원 등으로 러시아(구소련)로 이주한 이들로, 구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몰도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즈스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등 러시아 인근 독립국가연합 내에 거주하는 한인 교포들을 칭하는 총체적 용어다. 러시아어로 ‘까레이스키’라고도 부른다.

고려인문화관 주차장 내벽에 고려인들이 살았던 국가의 전통복장을 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여러 국가로 흩어져 있던 고려인들이 1990년대부터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고려인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경기 안산, 인천 연수구, 경북 경주, 광주 광산구 월곡동이 대표적이다. 주로 일거리를 찾을 수 있는 산단 인근에 형성돼 있다.

채와라 광주시 광산구 고려인마을활성화 팀장은 “광주 고려인마을에는 현재 법무부 추산 4800여 명이 살고 있다고 하는데 사단법인 고려인마을 측에서는 7000명 정도가 살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2000년 초반 10여 가구에서 시작해 지금의 규모로 확장된 거죠.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어린 아이들의 경우 고려인 5세대 정도 됩니다. 광산구에는 고려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외국인 근로자들이 살고 있어 대표적인 ‘다문화 도시’입니다.”

고려인은 타 외국인 근로자에 비해 한국 정착이 어렵지 않다. 여권에 ‘까레이스키(고려인)’라고 쓰여 있으면 재외동포로 보고 장기 비자를 내주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이 많이 살아서인지 월곡동에는 ‘세계음식문화의거리’가 조성돼 있다. 대부분 러시아어로 되어 있지만 베트남어, 중국어 등 간판부터 다국적이다.

월곡동 세계음식문화의거리 풍경. 외국어로 쓰인 간판이 즐비하다.

인근에 산단이 조성돼 외국인들이 찾아들고 고려인들이 모여 살면서 고국 음식에 대한 향수가 커지자 자연스럽게 현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생겨났다. 음식점과 카페는 물론 다양한 식재료를 구입할 수 있는 식료품점, 미용실, 뷰티숍, 여행사, 환전소, 꽃집, 잡화점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가게들이 하나둘 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마을이 형성됐다.

식품 잡화점에는 없는 게 없을 정도로 구성품이 다양하다. 고등어, 연어, 소시지의 종류도 갖가지고 빵과 파이, 호밀빵, 치즈나 유제품, 소스류도 다양하게 판매되고 보드카도 눈에 띈다.

고려인들을 중심으로 가게가 운영되지만 고려인 외에도 광주에 살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이나 외국인 유학생, 일반 시민들도 종종 이 거리를 찾곤 한다. 대화가 되지 않아 소통에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잠시 접어두어도 된다. 바디 랭귀지로도 충분하고 휴대폰 번역기가 있으니 말이다.

“고려인들은 기본적으로 러시아어를 사용합니다.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넘어갔을 때 당시에는 ‘소련’ 시대이다보니 러시아어를 공동으로 썼어요. 한국인들도 다 러시아어를 배우고 적응해서 잘 살았는데 1991년도에 소련이 해체되면서 러시아를 제외한 각 국가에서 더 이상 러시아어를 쓰지 않게 된 거에요. 그러다보니 더 높은 수준의 사회적 지위까지 올라가는 게 자연스럽게 막힐 수밖에 없는 거죠. 상황에 따라 한국으로 오신 분들도 있고 러시아로 돌아가거나 연해주로 가시기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으로 들어와 살고 있는 상당수의 고려인들은 한국어가 자유롭지 못하다. 어렸을 때부터 한국어를 계속해서 배우지 않기도 했지만 한국에 들어와서도 생계를 유지하며 살다보니 한국어를 배울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들을 위해 생겨난 게 ‘고려인종합지원센터’다.

2000년초 3~4가구의 고려인 가족이 광주에 정착해 마을공동체를 구성한 이후 2005년 300여 명으로 늘어나자 마을내 상담소를 운영하며 고려인동포 지원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고려인종합지원센터의 시작이다. 고려인종합지원센터와 함께 청소년센터, 지역아동센터가 고려인마을의 대표적 복지시설이다.

센터에서는 언어가 통하지 않은 고려인들의 고민 상담을 들어주고 해결책을 마련해주거나 일자리를 연결해주기도 한다. 고국이지만 생전 처음 찾은 낯선 땅에서의 생활에 ‘사막 속의 오아시스’ 같은 역할을 해주는 곳이기도 하다.

신조야 고려인마을 대표가 종합지원센터 센터장을 겸임하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처음 한국에 들어왔을 때 겪었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살던 신 대표는 23년 전 광주에 정착했다. 딸이 한국인과 국제결혼을 하면서 한국에 함께 들어왔다. 많은 외국인 근로자들이 그랬듯 공장을 다니며 생계활동을 했는데 임금체불이 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 이천영 목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 목사는 현재 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다.

센터 1층은 고려인 어린이집이다. 2012년 문을 연 이곳은 맞벌이 부부 가정의 어린이들을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맡아 돌보며 한글을 비롯한 학습, 운동, 다양한 문예활동을 지도하고 급식과 간식을 제공해준다.

3층은 고려인 방송국이다. 오랫동안 인터넷 방송을 통해 운영되던 ‘고려FM라디오’가 2022년 지상파 방송 허가를 받아 ‘FM 93.5MHz GBS 고려방송’으로 업그레이드 됐다. 고려인 동포들이 러시아어를 통해 한국소식은 물론 공동체 소식과 일자리 관련 소식 등 뉴스와 다양한 문화컨텐츠를 교류할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이기도 하다.

고려인역사유물전시관과 주민소통방으로 활용되고 있는 ‘월곡 고려인 문화관 결’.

마을을 걷다보니 초록색 이색 건물 하나가 눈에 띈다. 중앙아시아풍의 건축 형태와 진한 청록색의 벽이 독특하다. ‘월곡 고려인 문화관 결’이라고 쓰여진 대형 간판 아래로 카자흐스탄 고려인 문빅토르 화가가 기증한 ‘1937년 스탈린 정권에 의해 자행된 고려인 강제이주 열차’의 모습이 담긴 타일 벽화가 설치돼 있다.

고려인문화관 ‘결’은 복합문화공간이다. 고려인 관련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된 고려인역사유물전시관 ‘숨결’과 지역 주민들과 이주민들이 교류하는 주민소통방 ‘금결’로 구성돼 있다. 사단법인 고려인마을이 광산구로부터 수탁을 받아 운영하고 있다.

‘상설전시실’에서는 디아스포라 고려인들의 160년 역사를 ‘이주와 정착’, ‘항일운동’, ‘문화운동’, ‘강제이주와 시련의 극복’, ‘황무지에서 피워낸 민족혼’이라는 5개의 테마로 전시하고 있다.

‘중앙전시실’은 고려인의 삶과 역사에 대한 각종 영상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우리나라와 옛소련에서 제작한 다양한 영상물을 만날 수 있다. ‘기획전시실’은 고려인 이주사에서 일어난 주요 역사적 사건을 조명하는 공간이다. 1991년 옛소련에 설립됐던 광주한글학교, 옛 소련 지역에 존재했던 고려인 극장들의 자료를 살펴볼 수 있다.

‘특별전시실’은 항일운동가, 문화예술인, 한글문학 작가 등 고려인 사회에 헌신한 다양한 인물들을 발굴해 소개하는 공간이다. 살신성인의 구국 영웅 안중근, 노동운동과 항일운동의 선구자 김 알렉산드라, 국권회복에 몸 바친 고려인의 대부 최재형, 고려인 항일무장 투쟁의 선봉장 한창걸 등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한 위인들을 배우는 공간이기도 하다. 2월 28일까지 항일무장투쟁의 별 김경천 장군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센터에서 나와 조금만 걸어가면 ‘다모아 어린이공원’이다. 고려인마을 어린이들의 놀이터이자 어찌보면 유일한(?) 놀이공간이기도 하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않듯 학교가 끝나고 이곳 공원에 들러 친구와 수다를 떨거나 공놀이를 하고 가기도 한다. 하교 후 학원에 다니느라 놀이터에 어린이들이 없는 다른 동네 놀이터와는 달리 이곳은 겨울에도 늘 아이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다.

/글=이보람 기자 boram@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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