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을 닦으며
허 형 만
새로이 이사를 와서
형편없이 더럽게 슬어있는
흑갈색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지나온 생애에는
얼마나 지독한 녹이 슬어 있을지
부끄럽고 죄스러운 손이 아린 줄 몰랐다.
나는,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깊고 어두운 생명 저편을 보았다.
비늘처럼 총총히 돋혀있는
회한의 슬픈 역사 그것은 바다위에서
혼신의 힘으로 일어서는 빗방울
그리 살아온
마흔세 해 수많은 불면의 촉수가
노을 앞에서 바람 앞에서
철없이 울먹였던 뽀오얀 사랑까지
바로 내 영혼 깊숙이
칙칙하게 녹이 되어 슬어 있음을 보고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온몸으로 온몸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허형만 『供草』, 문학세계사, 1988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수록된 허형만 시인의 시 「녹을 닦으며」이다.
이 시는 새로이 이사를 간 집의 철제 대문의 녹을 닦으며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한 내용을 노래하고 있다. 몇 번 이사를 다니면서 집은 더 넓어지고 조명은 화려해졌지만 여전히 부정과 모순을 보지 못하고, 내 안의 녹을 외면한 채 수군대면서 허공에다 손가락질이나 해 대는 건 아닐까 자조하며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올바른 역사인식을 통해 회한으로 가득한 자신의 삶을 대문에 낀 녹을 닦으면서 자기 반성을 함은 물론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온몸으로 문지르는 행위를 통해 치열한 자기 성찰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공간의 변화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줄 수 있음도 새로이 이사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외부와 내면을 연결시킬 수 있는 소재를 등장시켰고, 구체적 행위와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실천을 부각시켰다. 인식은 실천을, 실천은 다시 더 깊은 인식을 불러옴을 추리할 수 있다.
마흔세 해 동안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화자는 대문에 낀 녹을 닦는 행위를 통해 과거 자신의 삶에 있었던 부정적 삶과 세월을 되새기며 앞으로의 삶을 긍정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의지를 그려 내고 있다. 결국 화자는 자신의 부끄러운 삶의 모습을 대문에 낀 녹과 같다고 생각하며, 녹을 닦는 행위를 통해 자기반성과 새로운 삶을 살아가겠다는 실천적 의지를 다지고 있다, 또한 이러한 성찰은 개인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역사의식과 함께 치열한 자아 성찰의 자세를 보여준 작품이다.
<이창민>
무안 출생. 아호 무은(務隱). 1964년 전남매일신문신춘 문예시부문 「광인」으로 등단. 문학예술신인상 수상(시) 2012년 봄호.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문학예술가협회 회원, 서은문학 홍보이사, 남도문학 수석부회장, 무안문인회 회원. 시집 『시를 읊조리는 나그네』 『새벽이 햇귀를 데리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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