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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재기자

[5·18 한눈에 보는 사적지] 학교·분수대·시장 … 도심 곳곳 선연한 항쟁의 기록

by 광주일보 2023.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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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도심 곳곳이 오월이다. 43년이 지난 지금, 누군가는 잊을 때도 됐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오월에 산다. 민주주의를 갈망하며 군사독재에 맞섰던 영령들은 산화하고, 그들이 벌였던 ‘열흘 간의 항쟁’ 기록은 광주 도심 곳곳에 5·18 사적지로 남았다. 계엄군의 총칼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했던 시민군, 빗발치는 총탄 속에도 헌혈을 위해 병원 앞에 줄지어 선 시민들, 주먹밥을 만들어 나눠준 재래시장 상인들. 이는 나눔과 희생의 ‘광주 정신’으로 빛났고, 항쟁 기간 대동 세상을 만들었다는 역사를 남겼다. 이러한 역사는 43년의 세월 속에도 변하지 않고 우리 주변에서 숨쉬고 있다.화창한 날씨, 가벼운 걸음으로 이제는 도시가 된 사적지 29곳을 돌아보자.

◇전남대학교 정문 (사적 1호)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찬연히 빛나는 5·18 민주화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1980년 5월 17일 자정 비상계엄 확대로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다음날인 18일 전남대생들의 항의에 계엄군의 폭력이 시작됐다.

◇광주역 광장 (사적 2호)

당시 광주시민과 계엄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대표적인 장소다. 20일 심야에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발포, 다수의 사상자가 나왔고 다음날 아침 주검 2구가 발견됐다.

◇옛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일대 (사적 3호)

전남 일원을 잇는 교통 중심지였다. 19일 계엄군이 대합실 등에 난입해 총검으로 무차별 진압해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소식은 시외버스를 타고 나간 승객들에 의해 전파되었고, 항쟁은 전남 전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금남로(구 가톨릭센터) (사적 4호)

5·18 민주화운동 기간 중 시민들이 계엄군에 맞서 연일 격렬하게 저항했던 대표적이며, 상징적인 항쟁의 자리다. 5·18 민주화운동 이후에도 진실을 밝히려는 투쟁들이 이 거리에서 이루어졌다.

◇구 전남도청 (사적 5-1호)

5·18민주화운동 본부가 있던 곳이며, 5월27일 계엄군의 무력 진압에 맞서 시민군들이 최후의 항전을 벌인 장소다. 당시 도청을 사수하던 많은 시민군이 산화한 곳이다.

◇5·18 민주광장 (사적 5-2호)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적 장소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민들이 광장 분수대를 연단으로 중심으로 집회를 열었던 곳이다.

항쟁 기간 중 5차례의 시민궐기대회를 열어 항쟁의지를 불태우고 ‘민주시민’ 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항쟁 이전 14일부터 16일까지 3일 동안 학생과 시민들이 대규모 민족·민주화 대성회를 열고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는 등 군사 통치 종식과 민주화를 촉구한 역사적 장소다.

◇상무관 (사적 5-3호)

계엄군의 집단 발포와 무자비한 진압에 희생된 주검이 임시 안치됐던 장소다. 시민들은 5·18 민주화운동 기간 동안 이 곳에서 줄 지어 분향하며 민주화의 의지를 다짐했다.

◇YMCA (사적 5-4호)

평소에도 광주 시민들이 자주 모이던 장소로, 5월 26일 밤 최후의 결사대가 이곳 1층 체육관에 모여 총기훈련 등을 실시하며 결사항전 의지를 다졌던 곳이다. 항쟁 이후에도 광주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수많은 집회가 열렸다.

◇광주YWCA 옛터 (사적 6호)

당시 광주 YWCA 건물이 있던 자리로, 청년·학생 투쟁본부가 있던 곳이다. 민주 인사들이 수시로 대책회의를 가졌던 공간이며, 24일부터는 송백회, 극회 광대단원들과 들불야학 청년들이 ‘민주시민회보’를 제작, 광주항쟁 소식을 전국에 알리며 범시민궐기대회를 준비했다.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을 공략하던 계엄군의 주요 공격 목표가 돼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광주MBC 옛터 (사적 7호)

당시 광주문화방송국(MBC)이 있었던 곳이다. 계엄군의 과잉 진압행위에 대한 보도가 군부 검열로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시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고, 이 과정에 20일 광주MBC 건물이 불탔다.

◇녹두서점 옛터 (사적 8호)

녹두서점이 있던 자리로, 유신 체제 민주청년들이 시국토론을 펼친 사랑방이었다. 들불야학에서 만든 투사회보가 녹두서점을 통해 배포됐고, 광주 전역에서 벌어지는 전투와 계엄군의 학살 소식 등 모든 정보가 모이는 상황실 역할을 한 곳이다.

◇전남대학교 병원(사적 9호)· 광주기독병원(사적 10호)·옛 적십자 병원(사적11호)

항쟁 기간 시민과 시민군의 야전병원이었다. 부상당한 시민과 시민군을 헌신적으로 치료해 의료인의 참모습을 보인 곳이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휴가까지 반납해가며 밤낮을 세우는 등 혼신의 노력이 있었고, 시민들의 헌혈 행렬이 이어지며 공동체 정신이 발휘된 장소들이다.

◇조선대학교 (사적 12호)

5월 18일부터 21일 오후까지 공수부대가 주둔한 장소다. 시내 곳곳에서 계엄군에게 무자비하게 끌려온 수 많은 시민들과 학생들이 이 곳 체육관에 수용돼 잔혹한 폭행과 고문을 당했다.

◇배고픈다리 일대 (사적 13호)

현재 홍림교로 불리는 광주 동구 학동의 ‘배고픈 다리’ 일대는 5월 21일, 시민군이 시내 중심가에서 계엄군을 물리친 뒤 모범적으로 지역 방위를 했던 곳이다. 조선대학교 뒷 산으로 퇴각한 계엄군이 다시 시내로 진출할 것을 대비해 5월 21일 오후부터 이 지역 예비군 등 젊은이들이 주축이 돼 지역방위대를 편성, 경계를 편 곳이다.

◇주남마을 인근 양민 학살지 (사적 14호)

5월 21일 주남마을에 주둔하던 계엄군이 광주―화순간 도로를 오가는 차량들에 무차별 총격을 자행했다. 계엄군의 양민 학살과 생존자 즉결처분이 일어난 곳이다. 23일에는 주남마을을 지키던 공수여단이 도시 외곽으로 나가는 시민군 버스에 집중 사격해 타고 있던 18명 중 15명이 사망했다. 생존한 남자 2명과 여고생 1명을 체포한 계엄군은 남성 2명을 산으로 끌고가 즉결처분해 암매장한 곳이다.

◇진월동·송암동 광주-목포 간 양민 학살지 (사적 15호)

계엄군 간 오인 사격으로 계엄군 다수가 사망·부상했으며, 이 과정에 두 어린이가 희생되기도 했다. 또, 계엄군들은 오인 사격 화풀이로 광·목 간 도로변 주택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을 살상했으며, 민간 차량에 무차별 사격을 가한 곳이다.

◇농성광장 격전지 (사적 16호)

5월 22일 광주시내에서 쫓겨난 계엄군이 통제선을 설치하고 농성광장의 시민군 방어선과 대치하는 과정에 인근 주택가에 총격을 가해 시민들이 희생당한 곳이다. 26일 새벽 계엄군이 시내로 다시 진입하려하자 시민 수습대책위원들이 구 도청에서 농성광장까지 ‘죽음의 행진’을 하면서 계엄군 장갑차의 진입을 저지한 의지의 현장이다.

◇상무대 옛터 (사적17호)

육군 전투병과 교육사령부 상무대가 있었던 자리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사령부 전남·북 계엄분소가 설치된 곳이다. 계엄군 주요 지휘관 회의가 이곳에서 주로 열렸고, 시민수습위원들이 몇차례 드나들며 군 수뇌부와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항쟁 뒤에는 시민 2500여명이 붙잡혀와 헌병대 영창에서 무자비한 고문과 구타를 당한 역사적 장소다.

◇무등경기장 정문 (사적 18호)

5월 20일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격분한 운전 기사들이 모여 항쟁 참가를 선언하고 차량시위를 시작한 곳이다. 운전기사들은 대형버스를 앞세워 경적을 울리고 전조등을 비추며 금남로로 행진했다. 시내버스와 택시 등 200여대의 차량이 참가했다. 이를 기리기 위해 5월 20일을 ‘민주기사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양동시장 (사적19호)

1973년 개설된 상설시장이다. 대인시장과 마찬가지로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들에게 주먹밥과 생필품을 제공하는 등 대동정신을 앞장서 발휘했던 장소다. 이러한 나눔과 연대는 남광주시장, 산수1동, 원산동, 충장로 일대에서도 이루어졌다.

◇광주공원광장 (사적 20호)-시민군 편성지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발포 이후 무장한 시민들이 집결한 곳이다. 24일 도청으로 시민군이 통합될 때까지 광주 시내 순찰, 차량 등록 등 일시적으로 치안관련 업무를 보았으며 시민군을 편성하고 사격술 훈련을 실시한 장소다.

◇5·18 최초발포지 (사적 21호)

광주고등학교 앞인 이 곳은 계엄군이 비무장 시민을 향해 최초로 발포를 했던 곳이다. 5월 19일 계엄군의 장갑차가 비상계엄 확대 반대를 외치는 시위 군중에게 포위되자 시민을 향해 발포, 조대부고에 다니던 김영찬 학생이 총상을 입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들의 투쟁이 한층 거세졌다.

◇광주교도소 (사적 22호)

광주교도소는 호남고속도로와 광주·담양을 잇는 곳에 위치해 계엄군과 다른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시민군 사이에 많은 충돌이 발생한 곳이다. 계엄군은 이 과정에서 담양과 순천 방면으로 향하던 차량과 시민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했고, 이러한 양민 학살을 신군부는 폭도들의 ‘교도소 습격’이라 호도했다.

◇국군광주병원 (사적 23호)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사에 연행돼 심문 과정에서 고문과 폭행으로 부상 당한 시민들이 끌려와 엄중한 감시 아래 강제 치료를 받았던 곳이다.

◇5·18 구묘지 (사적 24호)

5·18 민주화운동 당시 산화한 영령들이 묻혔던 곳으로 ‘망월동 묘지’라고 불려왔다. 5월 27일 새벽 도청의 시민군들을 제압한 계엄군은 29일 129구의 시신을 덤프 트럭에 마구 실어 급하게 이곳에 매장했다. 1997년 신묘역이 조성되면서 5·18 희생자들은 이장했고, 원형을 유지하기 위해 봉분은 그대로 남아있다. 5·18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되어 현재에도 추모의 발길이 끊기지 않고 있다.

◇남동성당 (사적 25호)

1980년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당시 김성용 주임신부를 비롯한 민주인사들이 모여서 시민들의 희생을 막기 위한 수습대책을 논의한 장소이다. 이를 바탕으로 남동성당은 인권운동의 상징으로, 저항운동의 구심점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됐다. 광주민주화운동의 희생자 추모미사를 이어오면서 5·18민중항쟁기념 성당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505보안부대 옛터 (사적 26호)

옛 전남지역 군 정보기관이었던 505보안부대가 자리잡고 있었던 곳이다. 이 부대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시를 받아 5·18을 기획, 관리, 통괄한 기관이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에는 신군부가 합동수사단을 설치해 이 지역의 민주인사들과 학생, 시민군 등을 연행해서 고문한 장소다. 5·18 민주화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거점이며, 신군부의 야만적 행태를 은폐, 조작했던 지휘본부였다.

◇들불야학 옛터 (사적 27호)

‘광천동성당’의 교리실이었으며, 1978년 들불야학이 설립돼 노동자들이 저녁에 공부했던 곳이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들불야학 교사와 학생들은 조직적으로 항쟁에 참여했고, 항쟁 지도부와 시민군으로 활동했다. 특히 왜곡된 언론을 대신해 ‘투사회보’를 비롯한 각종 유인물을 제작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윤상원, 박용준 두 교사가 희생됐으며, 이후 들불야학 구성원들은 많은 고초를 겪었다.

◇전일빌딩 245 (사적 28호)

계엄군의 헬기발포 총탄 흔적이 발견된 장소다. 금남로 1가 1번지에 위치한 건물로 당시 도청 일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는 점과 더불어 옛 전남일보(현 광주일보)와 전일방송이 입주해 있어 전략적 요충지였다. 계엄군이 퇴각한 이후에도 전일빌딩 옥상에는 시민군이 배치돼 계엄군의 재진입 시 공격 목표가 되었고 이로 인해 5월 27일 새벽 공중사격을 당했다. 전일빌딩의 외곽과 내부에 있는 탄흔들은 당시 헬기사격이 있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고 홍남순 변호사 가옥 (사적 29호)

5·18 당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토론과 회의를 진행했던 장소. 구속자 석방 논의, 관련 문건 작성 등을 했던 역사적인 공간이다. 홍남순은 꼿꼿한 리더십을 지닌 광주의 대표적 인권 변호사로, 60년대 이후부터 민주인사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 ‘재야 사랑방’ 이었다. 홍 변호사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남동성당 수습모임과 5월 26일 ‘죽음의 행진’에 참여한 이유로 ‘재야 수괴’로 몰려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석방 된 이후에도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다가 2006년 뇌출혈로 사망했다.

/유연재 기자 yjyou@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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