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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조사위 유해 발굴 계기로 본 5·18 당시 해남에선 무슨 일이?
당시 대대장 “병력 200명 목포로 보내 방위병력 100명 소집 실탄 배분”
“1명 부대내 매장·1명 이송” 주장했지만 유골 3구 발굴로 신빙성 떨어져
당시 부대 근무 병력 “PX 앞 시신 3구 방위병에게 매장하게 했다” 증언
해남군 해남읍 백야면 해남 예비군훈련장 인근에서 5·18 관련 사망자로 추정되는 유골 3구가 발굴<5월 15일자 광주일보 1면>되면서 1980년 5월 당시 해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5·18 당시 육군 31사단 93연대 2대대(해남대대)장을 지낸 장윤태(83·당시 중령)씨는 5·18 관련 사망자가 2명 뿐 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지만,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는 최대 7명까지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어 정확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장씨는 16일 광주일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5·18 당시 해남에서 사망한 인원은 2명이고, 1명을 부대내에 매장했다”고 밝혔다.
장씨는 당시 해남지역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면서도 광주에서 발생한 5·18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1980년 5월 21일 시민군들이 군용 차량을 타고와 실탄을 지급해 줄 것을 요구해 광주 상황을 알게됐다는 것이다. 21일과 22일 2차례에 걸쳐 시민군들이 찾아와 “총은 있으니 실탄 10만발을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거부하면 부대를 습격할 수 있겠다는 판단에 병력을 배치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93연대의 명령에 따라 자신이 지휘하는 해남대대 병력 200여명을 목포로 보낸 후라 부대안에는 대대장, 참모 4명 등 총 12명밖에 없었다고 한다.
결국 장씨는 방위병력 100여명을 소집해 현역 군복을 입히고 실탄까지 배분해 20명씩 5개 조로 해남에 배치했다.
이 과정에서 22일 장씨는 혹시 모를 교전에 대비해 93연대에 사격명령을 내려 달라고 요청했다고 증언했다.
이에 연대에서는 “최대한 총을 쏘지는 말되 만약 쏠거면 무릎 아래를 쏴라”는 답변이 돌아와 이를 방위병들에게 전했다고 한다.
이후 23일 새벽 5시께 해남 우슬재를 통해 들어오던 시민군들이 방위병력에 막혔고 방위병의 사격에 한 명이 복부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것으로 장씨는 기억하고 있다.
또 같은 날 오전 10시 해남 복평리에서 한차례 더 해남대대 병력의 사격으로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것이 장씨의 설명이다.
장씨는 “우슬재에서 사망한 사람은 부대내에 매장했고, 복평리에서 숨진 사람은 가족이 인계를 요청해 헬기에 실어 다른 지역으로 보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근 이 부대 인근에서 5·18당시 매장됐다는 당시 부대원의 증언으로 유골 3구가 발굴 됨에 따라 장씨의 증언에 신빙성이 떨어지고 있다. 지금껏 해남에서 사망자로 밝혀진 이들에 대한 증언만 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5·18사망자 검시조서에는 5월 23일 해남 우슬재 정상 도로에서 사망한 김귀환씨와 해남 학동리에서 사망한 박영철씨의 사망만이 확인되기 때문에 장씨는 이 2명에 대한 증언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검시조서에는 모두 M16에 의한 총상으로 사망했고, 흉부를 관통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특히 해남대대의 병력을 총 지휘하고 있는 책임자가 부대원의 총격에 의해 발생한 사망자를 모를 수 없다는 점에서 장씨의 증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16일 5·18조사위의 대국민보고회에서 발표된 조사내용도 장씨의 증언과는 달랐다. 해남대대 병력에 의한 총격 사건은 3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사위는 이 과정에서 최소 3~7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5월 23일 오전 6시께 해남대대 앞 국도상에서 버스 1대가 군의 총격으로 전복돼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같은 날 오전 6시 10분께 해남 우슬재에 배치돼 차단 임무를 수행하던 병력이 시민군 트럭이 총격을 가해 1명이 사망했고, 다수의 총상 환자가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
같은날 오전 10시 50분께는 시위대 50여 명이 탄 버스 2대가 마산면 상등리에서 차단병력의 총격으로 1명이 사망하고 다수가 총상을 입었으며 나머지 시위대는 군부대에 연행됐다는 증언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부대에 근무한 병력은 부대 내 PX 앞에 시신 3구를 늘어놓고 있다가 방위병에게 관속에 넣어 매장을 하게 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이번 발굴장소를 증언한 병사는 3구의 유골을 매장했다가 지문채취를 위해 다시 한구를 꺼냈지만, 부패가 심해 지문채취에 실패했다는 증언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송선태 5·18조사위원장은 “이번에 발굴된 유골 3구에 대해 나주·영암·목포·해남·강진·완도·진도 등지에서 실종·행방불명으로 신고된 24명의 가족 DNA 대조를 진행할 것”이라면서 “최종 DNA 포렌식 조사결과를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
/정병호 기자 jusbh@kwangju.co.kr
/유연재 기자 yjyou@kwangju.co.kr
5·18 당시 육군 31사단 93연대 2대대(해남대대)장을 지낸 장윤태(83·당시 중령)씨는 5·18 관련 사망자가 2명 뿐 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지만,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는 최대 7명까지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어 정확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장씨는 16일 광주일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5·18 당시 해남에서 사망한 인원은 2명이고, 1명을 부대내에 매장했다”고 밝혔다.
장씨는 당시 해남지역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면서도 광주에서 발생한 5·18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1980년 5월 21일 시민군들이 군용 차량을 타고와 실탄을 지급해 줄 것을 요구해 광주 상황을 알게됐다는 것이다. 21일과 22일 2차례에 걸쳐 시민군들이 찾아와 “총은 있으니 실탄 10만발을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거부하면 부대를 습격할 수 있겠다는 판단에 병력을 배치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93연대의 명령에 따라 자신이 지휘하는 해남대대 병력 200여명을 목포로 보낸 후라 부대안에는 대대장, 참모 4명 등 총 12명밖에 없었다고 한다.
결국 장씨는 방위병력 100여명을 소집해 현역 군복을 입히고 실탄까지 배분해 20명씩 5개 조로 해남에 배치했다.
이 과정에서 22일 장씨는 혹시 모를 교전에 대비해 93연대에 사격명령을 내려 달라고 요청했다고 증언했다.
이에 연대에서는 “최대한 총을 쏘지는 말되 만약 쏠거면 무릎 아래를 쏴라”는 답변이 돌아와 이를 방위병들에게 전했다고 한다.
이후 23일 새벽 5시께 해남 우슬재를 통해 들어오던 시민군들이 방위병력에 막혔고 방위병의 사격에 한 명이 복부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것으로 장씨는 기억하고 있다.
또 같은 날 오전 10시 해남 복평리에서 한차례 더 해남대대 병력의 사격으로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것이 장씨의 설명이다.
장씨는 “우슬재에서 사망한 사람은 부대내에 매장했고, 복평리에서 숨진 사람은 가족이 인계를 요청해 헬기에 실어 다른 지역으로 보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근 이 부대 인근에서 5·18당시 매장됐다는 당시 부대원의 증언으로 유골 3구가 발굴 됨에 따라 장씨의 증언에 신빙성이 떨어지고 있다. 지금껏 해남에서 사망자로 밝혀진 이들에 대한 증언만 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5·18사망자 검시조서에는 5월 23일 해남 우슬재 정상 도로에서 사망한 김귀환씨와 해남 학동리에서 사망한 박영철씨의 사망만이 확인되기 때문에 장씨는 이 2명에 대한 증언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검시조서에는 모두 M16에 의한 총상으로 사망했고, 흉부를 관통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특히 해남대대의 병력을 총 지휘하고 있는 책임자가 부대원의 총격에 의해 발생한 사망자를 모를 수 없다는 점에서 장씨의 증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16일 5·18조사위의 대국민보고회에서 발표된 조사내용도 장씨의 증언과는 달랐다. 해남대대 병력에 의한 총격 사건은 3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사위는 이 과정에서 최소 3~7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5월 23일 오전 6시께 해남대대 앞 국도상에서 버스 1대가 군의 총격으로 전복돼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같은 날 오전 6시 10분께 해남 우슬재에 배치돼 차단 임무를 수행하던 병력이 시민군 트럭이 총격을 가해 1명이 사망했고, 다수의 총상 환자가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
같은날 오전 10시 50분께는 시위대 50여 명이 탄 버스 2대가 마산면 상등리에서 차단병력의 총격으로 1명이 사망하고 다수가 총상을 입었으며 나머지 시위대는 군부대에 연행됐다는 증언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부대에 근무한 병력은 부대 내 PX 앞에 시신 3구를 늘어놓고 있다가 방위병에게 관속에 넣어 매장을 하게 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이번 발굴장소를 증언한 병사는 3구의 유골을 매장했다가 지문채취를 위해 다시 한구를 꺼냈지만, 부패가 심해 지문채취에 실패했다는 증언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송선태 5·18조사위원장은 “이번에 발굴된 유골 3구에 대해 나주·영암·목포·해남·강진·완도·진도 등지에서 실종·행방불명으로 신고된 24명의 가족 DNA 대조를 진행할 것”이라면서 “최종 DNA 포렌식 조사결과를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
/정병호 기자 jusbh@kwangju.co.kr
/유연재 기자 yjyou@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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