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사진 속 그 사람 - 부상 당한 시민군 후송한 정홍섭씨
홍안과 찾았다 계엄군에 구타
차량 끌고 곳곳 부상자 후송
아내 눈물의 요청에 집 돌아와
“진상규명·왜곡 처벌 이뤄져야”
“당시 계엄군은 젊은 사람들만 보이면 막무가내로 두드려 팼어요. 그때 금남로 일대를 돌아다니며 다치거나 숨진 시민들을 실어날랐는데, 그때 누군가 찍은 것 같아요.”
정홍섭(69)씨는 18일 미국 평화봉사단원 소속 팀 원버그 등과 5·18 당시 부상당한 시민들을 들 것으로 실어나르는 사진 속 급박했던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들 것으로 부상당한 시민군을 후송하는 사진은 5·18 당시 계엄군의 잔혹함과 무자비함뿐 아니라 위험에 처한 이웃들에 대한 적극적으로 구조 활동을 펼치고 있는 시민들의 공동체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상징적 사진이기도 하다.
사진 속 5명 중 한 명인 정씨는 광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더듬으며 떠올렸다.
사진에는 5월 22~23일께 동구 금남로 제일은행 앞에서 들 것으로 부상당한 시민을 실어나르고 있는 시민들이 찍혀 있다.
정씨는 젊은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때리는 계엄군의 만행을 두고 보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다른 시민들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섰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1980년 동구 반도상가 일대에서 여인숙을 운영했던 정씨는 5월 18일, 아내가 눈이 아프다는 말에 함께 ‘홍안과’를 찾았다가 계엄군과 마주쳤다가 이유 없이 곤봉으로 두들겨 맞았다.
29세 혈기왕성하던 정씨는 아픈 몸을 집으로 이끌고 들어왔지만 분을 삭히지 못했다. 시내 곳곳에서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이 자행되고 있다는 말도 끊이질 않았다.
그는 신군부와 계엄군 퇴진 등을 외치는 시민대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정씨는 5월 18일부터 26일까지 시민군으로 활동했다. 차량을 끌고 시내 곳곳을 돌며 부상자를 후송하거나 참여를 독려했다. 하지만 계엄군 진압 작전이 있기 전날인 26일 밤 9시, 두 살배기 아들을 업고 찾아온 아내를 혼자 돌려보내지 못해 집으로 돌아왔다.
정씨는 “바지를 잡고 늘어지며 우는 아내를 뿌리칠 수 없었다”면서 “당시 상무관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동료들을 뒤로했던 죄스러움을 떨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정씨가 도청을 떠난 뒤 7시간 뒤인 27일 새벽 4시께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시작됐다.
정씨는 “그날 집으로 돌아와 목숨은 건질 수 있었지만 그날 함께 하지 죄책감은 평생 가슴 속에 남아있다”고 말했다.
정씨는 28일 무장한 채 들이닥친 계엄군에게 붙잡혀 상무대로 끌려가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했다 정씨는 “그때의 트라우마가 여전하다”고 말했다.
이후 내란음모죄 혐의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정씨는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폭도’라는 낙인 때문에 정상적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정씨는 “당장 먹고 살아야 해 택시기사 일을 시작했는데, 출근 3일째 되던 날 택시회사 사장이 일을 그만두라고 하더라”라며 “알고 보니 내가 택시를 타고 출근을 하면 경찰 정보과 직원들이 회사 사무실에 진을 치고 앉아 영업을 방해해왔다. 사장님에게 미안해 내 발로 회사를 나왔다”고 말했다.
정씨는 40주년을 맞아 광주를 찾은 문재인 대통령이 발표한 기념사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정씨는 “이미 40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다. 늦었지만 대통령 약속대로 올해 5·18 진상 규명과 왜곡과 폄훼를 끊는 계기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민석 기자 ms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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