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 다듬듯 ‘詩 다듬는’ 16세 때부터 전국 떠돌다 광주 용봉동 정착한 뒤 창작 활동 “3·4·5·6 운율의 재밌는 시…독자들 사랑이 가장 큰 힘이죠”
오랜 세월 용봉동 마을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다듬어 왔듯, 섬세하게 시(詩)를 다듬는 이발사가 있다.
지난 1992년부터 용봉동에서 이발소를 운영해 온 설상환(69) 시인은 최근 시집 ‘머리카락을 다듬으며 쓴 시’를 출간했다. ‘붕어빵이 행복한 이유’, ‘무궁화가 무궁화에게’를 잇는 세 번째 시집이다.
설 시인은 ‘민조시’(民調詩)를 쓰는 시인이다. 민조시는 신세훈 시인이 연구·개척한 정형시로, 우리 조상들이 민간 장단에서 유래한 전통적인 운율을 3·4·5·6조 정형률에 맞춰 쓴 시다. 지난 2000년 신 시인이 ‘새정형시 민조시 개척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설 시인은 “3·4·5·6조로 맞춰 시를 마치기도 하고, 때로는 ‘거듭장단’을 쳐서 같은 장단을 반복하기도 한다. 정형시면서도 신축성 있는 재밌는 시다”며 “등단할 적에는 자유시, 시조시를 주로 썼는데, 우리 민족의 얼을 담은 민조시가 좋아 배우고, 또 쓰게 됐다”고 설명했다.
‘흐르다/ 돌아가고,// 바위도 뚫어/ 하늘이 된 바다.’(‘물처럼 살리’ 중에서)
‘바람결 적은 글씨/ 읽다가 보니,// 저녁놀이 붉다.’(‘지나가다’ 중에서)
순창군 출신인 설 시인은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14세 때부터 이발 기술을 배우고, 16세부터 전국을 돌며 떠돌이 이발사 직원으로 생활했다.
“대구에 있을 적에, 우연히 길에서 시 ‘목마와 숙녀’가 들려왔어요. 절망적이면서도 슬픔이 우러나오는 시구에 가슴이 저렸고, ‘이게 시구나’라는 걸 깨달았죠. 그 때부터 닥치는 대로 시집과 책을 읽으며 구절들을 새겼습니다.”
그는 용봉동에 정착해 이발소를 연 이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이발소에서 겪은 일상부터 못 이룬 배움의 꿈, 쌓인 그리움과 한(恨)이 시상이 됐다.
설 시인은 “매 순간 순간마다 시가 떠오른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조용한 데서 시상을 떠올리고, 엉킨 실타래를 풀듯 시를 쓴다”며 “때로는 신들린 듯이 하루에 10편씩 시를 쏟아내면서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고 웃었다.
손님들에게 새 책을 나눠주고 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더 좋은 시를 써야겠다’는 다짐이 굳어진다는 그다.
“독자들이 제 시를 잘 읽어주시는 게 가장 큰 힘이죠. 단지 시가 좋아서, 무지렁이가 쓴 시지만요.(웃음) 좋은 시를 많이 남겨서 민조시의 역사에 한 줄 보탬이 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한편 설 시인은 지난 1994년 ‘문예사조’에서 시로, ‘문학춘추’에서 시조로 당선돼 등단했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국제PEN한국본부, 한국민조시인협회, 광주시 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