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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예향

[유배지에 핀 문화의 꽃] 유배지에서 성찰하고 위로받다

by 광주일보 2021.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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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은 창조의 시간…손암, 다산, 우봉, 원교가 뿌린 문화의 씨앗
영화 ‘자산어보’, 장편소설 ‘흑산도 하늘길’ ‘흑산’ 등 작품도 인기

조선왕조는 죄 지은 선비와 관료를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도와 흑산도 등 절해고도와 변방오지로 유배 보냈다. 신안 흑산도로 유배당한 손암 정약전의 ‘자산어보’를 테마로한 같은 제목의 영화(감독 이준익) 촬영을 위해 도초도에 세운 세트장. <신안군 제공>

각박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유배문화와 전남 유배지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손암 정약전과 다산 정약용 형제, 추사 김정희, 우봉 조희룡, 원교 이광사 등은 당대에 죄인으로 신안 흑산도와 강진, 제주도, 임자도, 신지도 등 유배지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수백 년이 흐른 요즘에는 역경 속에서도 학문·예술세계의 넓이와 폭을 확장한 역사인물로 재평가받고 있다. 

1801년 음력 11월, 유배길에 오른 손암 정약전과 다산 정약용 형제는 나주 율정 주막거리에서 헤어진 후 흑산도와 강진에서 16~18년 동안 각자 유배생활을 하며 끝내 만나지 못했다. 강진 ‘다산박물관’과 신안 흑산도 유배문화공원에 세워져 있는 다산과 손암 동상.
 

◇신유박해로 정약전·약용 형제 귀양길=“내가 아는 지식과 너의 물고기 지식을 바꾸자!”

지난 3월 개봉한 영화 ‘자산어보’(감독 이준익)에서 손암 정약전(1758~1816)은 청년어부 ‘창대’(장덕순)에게 이렇게 말한다. 손암은 우이도 진리에서 9년, 흑산도 사리에서 7년을 지내다 세상을 떠났다. 그렇지만 그는 유배지에서 좌절하지 않았다. 서당을 열어 마을 주민들의 자제들을 가르쳤고, 실학자의 입장에서 흑산도(玆山) 바다에서 서식하는 물고기와 해양생물을 관찰했다. 그리고 토착민인 창대의 도움을 받아 흑산 해역에 서식하는 어족(魚族)을 정리한 ‘자산어보’(玆山魚譜)를 1814년에 완성해 후세에 남겼다.

◇기약 없는 ‘유배, 살아남기 혹은 버티기=유배는 조선시대 형벌중 하나이다. 조선은 중국 명나라의 형법전인 ’대명률‘(大明律)에 따라 5형(刑)제도를 시행했다. ‘태형(苔刑)-장형(杖刑)-도형(徒刑)-유형(流刑)-사형(死刑)’이다.

유형은 흑산도 등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절도’(絶島)나 삼수·갑산과 같은 변두리인 ‘원악지‘(遠惡地) 또는 ’극변’(極邊)과 같은 특정지역에 무기한으로 격리시켜 생활하게 하는 일종의 무기 구금형이다. 게다가 장 100대를 추가로 맞아야 했다. 장소를 한양이나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냈을 뿐만 아니라 심한 경우는 거처를 탱자나무 등 가시덤불로 사방을 에워싸는 ‘위리안치’(圍籬安置)형을 내리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감사죄일등’(減死罪一等·죽을 죄를 한 등급 감하여 (죽이지 않고 멀리 유배 보낸다)는 의미)이라고 했던 유배는 흔한 형벌이었다. 사대부 가운데 4분의 1이 유배를 경험했다고 한다. 특히 당파를 달리하는 정치적 라이벌 탄압 등에 악용돼 정권이 바뀌면 유배와 해배가 교차됐다. 유배형은 일본에 사법권을 완전히 박탈당한 1909년(대한제국 융희 3년)에 공식 폐지됐다.

김대현 전남대 국문학과 교수의 연구논문 ‘호남의 유배인과 제주의 유배문화에 대하여’(2019년)에 따르면 제주를 포함해 호남지역으로 유배온 이는 928명이다.

이 가운데 239명(23.5%)이 제주도에, 685명(67.4%)이 신안(160명), 진도(109명), 완도(98명), 해남(63명), 고흥(45명), 강진(38명)에 집중됐다. 특히 신안 흑산도·임자도, 진도 금갑도(접도), 완도 신지도, 해남~제주 뱃길 중간에 위치한 추자도 등 외딴섬이 단골 유배지였다. 호남지역으로 유배돼온 많은 선비(관료)가운데 우봉 조희룡(신안 임자도)과 원교 이광사(신지도)의 유배생활에 대해 살펴보자.

우봉 조희룡의 유배지인 신안 임자도 이흑암리에 세워진 ‘조희룡 기념비’.
 

◇유배지에서 예술의 꽃피운 조희룡·이광사=임자도는 30여명이 귀양살이를 했던 유배지이면서 조선 후기 대표화가인 우봉(又峯) 조희룡의 예술 혼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지난 3월말, 신안 지도와 임자도를 잇는 임자대교가 개통됨에 따라 임자도는 뭍과 이어졌다.

우봉은 63세이던 1851년에 예송논쟁(禮訟論爭·효종 사후 계모인 자의대비의 상복 입는 기간을 둘러싸고 벌어진 서인·남인간 논쟁) 여파로 임자도에 유배됐다. 우봉은 이흑암리 바닷가 마을 적거지에 ‘만구음관’(萬鷗吟館)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만 마리의 갈매기가 우는 집’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우봉은 2년 동안의 유배생활을 통해 예술세계의 ‘터닝 포인트’로 삼았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천둥이 내려치던 어느 새벽, 승천하는 용을 봤다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리기 시작한 ‘용매도’(龍梅圖)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조선 후기 문인이자 서예가인 원교(員嶠) 이광사(1705~1777) 또한 1755년 일어난 ‘나주 괘서(掛書)사건’에 연루돼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됐다가 1762년 다시 신지도로 이배(移配)돼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신지 유배지에서 원교는 동국진체를 완성했고, 서예 이론서인 ‘원교서결’(員嶠書訣)를 저술해 조선 서예이론 체계를 구축했다.

◇유배문화를 지역 문화관광 자산으로 활용=신안과 진도, 강진 등 전남 곳곳에는 유배인이 남긴 발자취가 남아있다. 그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서당을 열어 학문을 전파하고 예술 혼을 불태웠다. 유배인들이 뿌린 씨앗은 척박한 지역의 문화예술 토양을 기름지게 하는 토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수백 년전 유배인과 그들이 남긴 유배문화는 현대의 우리에게 어떠한 가치를 갖는가?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소설가 한승원은 지난 2005년 펴낸 장편소설 ‘흑산도 하늘길’에 ‘손암 정약전 인터뷰’를 덧붙였다. 작가는 손암의 가상 인터뷰에서 ‘(두 선생님이) 강진과 흑산도에 유배살이를 한 까닭으로 오늘의 정약용과 정약전이 되었다’면서 ‘장흥 바닷가 마을에 토굴을 짓고 그 속에 저를 가두기로 작정한 것은 감히 두 분 선생님을 거울로 삼고 따르려 한 까닭’이라고 강조한다.

“만일 두 선생의 벼슬길이 벌판 한가운데의 탄탄대로처럼 트였더라면, 그리하여 정승까지 순탄하게 지내시면서 누릴 광영 다 누리고 사셨다면 그 많은 저술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정약전 선생께서도 흑산도에 유배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현산어보’라는 책을 지으셨겠습니까?”

낯선 곳에서 수년~수십 년간의 귀양살이를 하며 자신을 성찰하고 학문적 깊이와 폭을 넓혔던 유배인들의 생애와 그가 남긴 저술은 현대인들에게 깊은 울림과 영감을 준다. 외진 곳에 자리한 그들의 유배지를 일부러 찾아 나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안군과 제주도, 남해시 등 유배지를 품은 전국 각 지자체에서 유배문화 관련 시설을 만들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신안 흑산도에 ‘자산문화관’과 ‘유배문화공원’이 조성됐고, 제주도에 ‘추사기념관’, 경남 남해시에 ‘남해유배문학관’, 경북 포항시에 ‘장기 유배문화체험촌’이 각각 문을 열었다.

최성환 목포대 사학과 교수는 ‘유배인의 섬 생활’에서 신안지역 섬의 유배문화에 대해 “빠르고 각박하게 돌아가는 현대 도시인의 삶에서 약간의 여유와 쉼을 돌아보게 하는 콘텐츠”라고 분석하면서 “섬 유배인의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고 이런 이야기들은 문화콘텐츠 시대 스토리텔링 자원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전망했다.

요즘 현대인들은 일부러 숲이나 섬을 찾아 자발적 ‘유배’에 나선다. 속도 만능의 시대에 ‘쉼’과 ‘자기 성찰’이 필요한 때문이다. 앞으로 지자체가 벌이는 유배문화 관련 사업들이 단순하게 공간을 복원하는 데서 나아가 유배인들의 스토리텔링에 숨결을 불어넣어 새로운 문화관광자원으로서 생생하게 살아나기를 기대한다.

/글·사진=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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