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브랜드다, 도시를 빛낸 예술가 공간-독일 뉘른베르크 ‘뒤러 하우스’]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 등 중세미술의 대가 타계 300주년 맞아
시, 뒤러 집 매입 미술관으로 바꾸고 ‘뒤러의 도시’ 브랜드화 시동
뉘른베르크성·성 로렌츠교회 등 중세도시로의 ‘시간여행’ 인기
이름은 몰라도 그림은 눈에 익숙한 작가들이 있다. 독일이 자랑하는 중세미술의 대가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가 그중의 한 사람이다.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과 ‘기도하는 손’은 어디선가 한번 본 듯한 유명한 그림이다. 뒤러를 배출한 독일의 소도시 뉘른베르크는 20년간 거주했던 뒤러하우스를 시립미술관으로 가꿔 지역의 문화자산으로 키우는 등 ‘뒤러의 도시’로 브랜드화 하고 있다.
반통나무로 지어진 뒤러 하우스는 1, 2차 세계대전의 공습에도 다행스럽게 큰 피해를 입지 않아 뉘른베르크성, 성 로렌츠교회 등 중세도시의 유적지와 어우러져 ‘시간여행’을 꿈꾸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뒤러하우스로 가는 길목에는 뒤러 광장, 부인의 이름을 딴 ‘아그네스 길’ 등 도시 곳곳에 뒤러의 예술혼이 숨쉰다.
“뒤러는 예술가이자, 상남자이고, 크리스찬이며 휴머니스트이다.”
1500년 대 독일 전통건축양식을 보존하고 있는 뒤러하우스 전경.
뉘른베르크의 올드 타운에 자리하고 있는 ‘알브레히트 뒤러 하우스’(Albrecht Durer’s House·이하 뒤러하우스)에 들어서자 침실 입구에 내걸린 슬로건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16세기의 건축양식을 간직하고 있는 내부는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이자 목판화가로 부와 명성을 얻었던 알브레히트 뒤러의 생활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금방이라도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것만 같은 오래된 나무 계단, 큼직한 수프냄비와 철제로 만든 접시들, 고풍스런 분위기가 풍기는 화병…. 비좁은 계단을 지나 만나게 되는 거실과 주방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되돌아 간듯 옛 모습 그대로다. 그의 손때가 묻은 책상과 의자, 도자기로 만든 초록색 난로에선 위대한 예술가의 서민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다.
맞은 편에는 빼어난 목판화로 유럽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그의 작업실이 나온다. ‘워크숍 룸’(Workship chamber)으로 불리는 이 곳은 뒤러 하우스에서 가장 넓은 공간으로 직접 나무판넬에 그림을 새겨 넣은 후 판화로 찍어냈던 기계, 동판, 붓, 염료 등 다양한 화구들이 전시돼 있다. 방문객들의 생생한 관람을 위해 유리전시관이 아닌, 나무 탁자 위에 유품들을 진열한 독특한 방식이 흥미를 자아낸다.
뭐니뭐니해도 뒤러하우스의 하이라이트는 1층의 ‘뒤러의 방’(The Durer Room)이다. 전시장 입구에는 대표작인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의 대형 이미지가 벽면을 뒤덮고 있고, 중앙의 작은 유리상자안에 이 작품의 복제품이 내걸려 있다. 뉘른베르크시는 1817년 스웨덴 시인 아테르봄(Attebom)의 검증(?)을 받아 요한 게오르크 폰 하겐(Johann Georg von Hagen) 컬렉션으로 이 자화상과 더불어 몇 점의 목판화 작품을 구입했다.
훗날 자화상이 진품이 아니라는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일었지만 오리지널에 가까운 퀄리티와 작품이 지닌 상징성을 고려해 뒤러하우스에 영구전시하게 됐다. 실제로 복제품은 캔버스의 질감 등에 여러 면에서 ‘원작’이라고 여길 만큼 뛰어난 정교함을 보여준다. 현재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 작품은 뮌헨의 알테 피나코테크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이 지닌 미술사적 가치는 매우 높다. 북유럽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불릴 만큼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뒤러는 비록 낮에는 신분이 낮은 수공업자였지만 화가이자 미술이론가, 지식인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 적극적이었다. 부의 상징인 모피 코트를 입고 그리스도의 얼굴을 좌우대칭으로 표현한 초상화법은 이런 뒤러의 강한 자의식을 뒷받침한다.
1층의 ‘뒤러의 방’으로 들어서면 마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시대로 되돌아간듯한 착각이 든다. 붉은 색 벽면의 전시장을 메운 그림들은 북유럽에서 가장 먼저 르네상스미술의 영향을 받은 뒤러의 작품들로 이들 역시 진품이 아닌 복제품이다.
여기에는 뉘른베르크시의 고충이 있었다. 뒤러하우스의 소장품으로 뒤러 작품들을 구입하려고 했지만 워낙 전 세계의 미술관에 흩어져 있는 데다 대부분의 미술관이 높은 가격에도 판매를 거부해 어려움을 겪은 것이다. 그의 작품이 뉘른베르크를 떠나게 된 데에는 아픈 ‘과거’가 있다.
지난 1627년 바이에른을 통치한 막스밀리언 1세는 뒤러의 ‘네 사도’(Four Apostles)등의 작품을 뮌헨 등 독일 전역으로 보내는 바람에 뉘른베르크시는 1805년까지 뒤러의 작품 대부분을 잃어 버리게 됐다.
뉘른베르크시는 독일과 유럽,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뒤러의 진품회수가 현실적으로 어렵자 그의 예술정신을 기리기 위해 복제품을 수집하기로 하고 대규모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1928년 세계 유수의 미술관으로 부터 뒤러의 작품을 한시적으로 빌려온 뉘른베르크시는 지역 작가들에게 현장에서 진품을 복사하는 미션을 전달했다.
현재 뒤러하우스의 전시장에 내걸린 작품들은 그 때 시의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작가들이 그린 작품들이다. 비록 뒤러의 진품을 소장하지는 못하지만 이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 작가들에게 뒤러의 예술정신을 계승시키는 공공성을 부여한 것이다.
뉘른베르크시에서 뒤러 하우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다. 한때 제1,2차 세계대전 당치 나치의 근거지였던 시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도시의 일부가 파손됐지만 다행스럽게도 1509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뒤러가 20년간 거주했던 이 집을 미술관으로 꾸미기 위해 타계 300주년이었던 1828년 매입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수 차례 주인이 바뀌면서 건물의 구조가 변경되는 등 원형을 잃게 되자 더 이상의 훼손을 막기 위해 공유화 하기로 한 것.
또한 그의 탄생 400주년이던 1871년 뉘른베르크시는 ‘뒤러의 해’로 선포하고 ‘알브레히트 뒤러 재단’을 설립해 지역의 문화재로 복원하는 등 대대적인 브랜드화 작업에 착수했다. 이처럼 1828년 뉘른베르크시의 지원을 받아 탄생한 뒤러하우스는 역사상 가장 오래된 ‘작가 미술관’이자 오늘날 예술가를 기리는 미술관의 전통을 세우게 된 사례로 꼽힌다.
뒤러하우스는 뉘른베르크시의 문화 1번지 답게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그중에서도 ‘아그네스(Agnes·뒤러의 부인이름)와 함께하는 미술관 투어’는 인기가 높다.
뒤러하우스의 홍보담당은 “관람객들과의 친밀한 소통을 위해 생전 뒤러의 부인 아그네스의 역할을 대행하는 가이드가 미술관 곳곳을 소개한다”면서 “중세시대의 옷과 머리수건을 두른 가이드가 침실과 주방 등을 안내하면 관람객들은 마치 400여년 전으로 되돌아간듯한 착각에 빠진다”고 말했다.
/뉘른베르크=글·사진 박진현 문화선임기자 jh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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