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군 운암면 전투서 1만여 왜군 궤멸시킨 충장공 양대박
죽천 범기생, 400여 병선 구축 한강 양회진 대승
형제의병장 홍민언·민성, 남원 여원치 고개서 왜적 참살
의병장들의 정규 훈련을 받은 적 없고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양반, 농민 등을 이끌며, 신무기 조총을 지닌 정규군 왜적들과 맞섰다. 남도 의병은 충남 금산성, 수원 독산성, 경남 진주성 등 타 지역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물러섬없이 처절히 싸우다 전사했다는 점에서 그 구국충절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광주일보 ‘의병열전(1975.12.1~1977.7.21)’에 명시된 의병장들의 전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표의장 심우신
심우신은 47세 나이에 어머니 삼년상 중 왜란이 발발했다. 도원수 김명원의 종사관으로 종군했으나 김명원이 변복한채 임진강으로 도망치면서 가족을 이끌고 처가가 있는 영광으로 내려왔다. 외서면(현 장성군 삼서면)에서 처남 임두춘 등과 1,000여 명을 모아 거병하고, 처가 재산을 처분해 병기와 군량을 모았다. 주변에 연병장을 만들어 군율에 따라 8월 한 달 동안 엄격하게 훈련시켜 아들 허와 함께 1592년 9월 1일 출정했다. 법성포로 나아가 금강 어귀에 상륙해 황간과 함께 청주권율, 의병장 변사정, 임희진, 승장 처영 등과 함께 한양 공격을 기다렸다. 경기도 일대에서 약탈하던 왜적들을 쫓아내고, 한양 양화진에서 김천일을 만났다. 선조는 우신에게 남양도호부사 겸 기보진무사에 제수했지만, 이를 모르고 남하해 김천일과 함께 진주성에 들어가 동문 수비를 맡았다. 남강에 투신하는 김천일 등을 보고 “나는 무인이니 헛되이 죽을 수 없다”며 화살을 쏘다 다 떨어지자 자결했다.
월파 유팽로
1592년 2월 성균관 학론(종9품)에 임명된 뒤 임란이 나자 토적지계를 올렸으며, 신흠, 이정구, 김상용, 김상헌, 이귀 등 젊은 신하들과 논의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단독 의거를 결정한 팽로는 4월 17일 양주 선영, 다음날 용인 5대조 묘소에 들러 성묘하며 밤을 지냈다. 묘지기 김충남에게 곡성 옥과에 내려가 거병을 준비하도록 하고 자신은 한양으로 돌아와 함께 할 벗들을 소집했다. 이 때 어의 허준이 찾아와 수십관의 약재를 주며 격려하기도 했다.
순창에서 왜적에게 항복하려는 부랑배들을 홀로 설득해 이들을 부하로 만들었으며, 기병 200여 명, 보병 300여 명 등의 군진을 정비한 후 옥과로 향했다. 4월 21일 500여 의병은 청색기를 휘날리며 전진해 옥과에 도착, 병기창고에 있던 녹슨 칼, 창 등을 손질하는 한편 들판에서 훈련도 진행했다. 4월 24일에는 양산과 밀양이 왜적에 함락되면서 부하이자 친구인 홍리원을 순천 방면으로 보내 왜적의 만행을 염탐하게 한 뒤 5월 11일 왜적이 침략한 임실, 갈택 등의 주민 보호를 위해 40여 명으로 특공대를 선발해 기습 공략에 나섰다. 왜적을 무찌르자 주민들은 잔치를 벌여 의병들을 격려했다. 남원에서 팽로의 이종형인 양대박이 거병해 팽로와 병사를 합쳐 800여 명으로 늘어났으며, 이후 담양추성관에서 혈맹을 맺고 고경명의 전라좌도의병군에 합류했다. 7,000여 명의 병사를 5개 부대로 나눴으며, 중앙은 황색기의 고경명, 동쪽은 청색기의 유팽로, 남쪽은 홍색기의 양대박, 북쪽은 흑색기의 안영, 서쪽은 백색기의 고인후가 맡았다.
금산성 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왜적에 포위된 팽로가 가까스로 탈출했으나 고경명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적진으로 들어가려했다. 이를 말리는 충복 김충남이 말고삐를 잡고 안 놔주자 왼손과 오른손을 모두 자르고 적진 안으로 들어가 장렬히 전사했다.
충장공 양대박
양대박은 담양추성관에서 혈맹을 맺고 남원으로 돌아와 결사대 자원을 받아 1,500여 명을 선발했다. 1592년 6월 24일 새벽 고경명과 전주에 만나기로 하고 출정해 임실군 강진면 갈택리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됐다. 인근 운암에 1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왜적이 진을 치고 있다는 내용을 농민들에게 전해들은 대박은 큰 아들 경우에게 군사를 나눠 고경명에게 가도록 하고, 둘째 아들 형우에게는 500여 명의 군사를 주고 골짜기에 매복할 것을 지시했다. 이후 대박이 기습공격에 나서고 왜적은 방심한 가운데 우왕좌왕했으며, 둘째 아들 형우가 후방에서 공격해 들어갔다. 대박은 도망치는 왜적 50여 명의 목을 직접 베는 등 1,000여 명을 궤멸시켰으며, 김수현, 박재운 등 포로 수백여 명도 구출했다. 구체적인 전과는 참수 1,207급, 철의(갑옷) 42벌, 대소총 79정, 전마 95필의 대승으로, 아군의 전사자는 40여 명에 불과했다. 남원 양씨의 세보(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혈통과 집안의 역사에 대한 기록을 모아 엮은 책)의 권두에 ‘운암파왜도(雲岩破倭圖)’가 실려 있다. 이 그림에서 양대박은 흑마를 타고 장검을 휘두르며 산에서 나오고 있으며, 아들 형우는 산 위에서 언월도를 휘두르며 왜적을 추격하고 있다. 전주 인근에서 왜적은 반격을 시도하지만, ‘의병장 양공’이라는 깃발을 올리자 퇴각하는 등 위용을 날렸다. 호남 의병 중 최초로 왜적과 싸워 대승을 거둔 대박은 진중에서 과로로 병사했다. 맏아들 경우는 1595년 군량을 모아 명군을 도왔다.
죽천 범기생
도탄 변사정의 편지를 받고 의병 참여를 결심한 범기생은 광주에서 수백 명의 의병을 규합해 나주에 의병청을 설치한 김천일을 찾아갔다. 여기서 의병의 기율을 세우고 훈련을 맡았다. 김천일 의병이 수원까지 진출하자 기생은 단신으로 한양에 들어가 왜적의 진지를 염탐하고 5일만에 돌아와 한양 공략이 어려울 것이라고 보고했다. 강화도로 진을 옮기자 기생은 어선을 개조하고 왜적의 선박을 나포해 단시간에 400여 척의 병선을 구축했다. 1592년 9월 9일 이를 이끌고 나가 한강 양회진에서 대승을 거뒀다. 기생은 이를 지켜보며 배 위에서 “한산달에 칼을 씻고 한수 바람에 배를 매니 장부로서 적을 쫓는 일이 마음에 가득하다”는 시를 지었다.
1593년 4월 18일 한양에서 철수하는 왜군을 추격하며 6월 14일 함안에 도달한 기생은 진주성 입성을 결심하며 “천리를 행군하여 진양(진주)으로 들어가니 성에 가득한 달빛에 갑옷마저 차도다. 함께 온 장병들의 충의가 가득 차니 동남의 아무리 강한 적인들 두려울 것 있으랴”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형제의병장 홍민언·홍민성
임란이 발발한 뒤 55세의 민언은 미처 준비를 못해 고경명 의병에 참가하지 못하고 먼저 군량을 보냈다. 이후 동생 민성, 아들 시정과 함께 1592년 8월 15일 500여 명을 이끌고 스승인 조헌에게 합류하기 위해 출병했으나 장성을 지나 갈재에서 조헌의 전사 소식을 접하고 되돌아와 괴정 최시망의 거병에 참여했다.
전라도의 변경을 지키다 1593년 3월 왜적이 진주성 2차 공격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진주성으로 가던 민언·민성은 남원군 이백면과 운봉면 사이 여원치라는 고개에서 왜적 400여 명과 조우했다. 이중삼중으로 복병을 설치한 민언·민성은 야영하던 왜적을 기습공격해 208명을 참살하고 함양 쪽으로 후퇴하는 왜적을 추격했다.
최시망은 민언·민성의 공을 도체찰사에게로 알려 상을 내렸지만 사양하고, 막하별장 정충훈이 대신 받게 했다. 민언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잠시 민성에게 군대를 맡기고 귀향했으며, 진주성으로 남하하던 민성은 왜적의 복병을 만나 접전 끝에 혈로로 탈출했다. 최시망은 허벅지에 총탄을 맞아 귀향했고, 민성은 6월 15일 진주성에 들어가 김천일로부터 성을 재정비하고 구축하는 임무를 맡았다. 6월 18일 과로로 온몸에 마비가 온 민성은 부하들의 부축을 받아 귀향길에 올랐다.
나주에서 만난 민언·민성은 다시 의병 조련에 나서다가 진주성 함락 소식에 통곡했다. 나주로 왜적들이 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민언은 아들 시정과 함께 남평 드들강 바위 틈에 군사를 배치해 왜적 300여 명을 참살하고 포로 152명을 구해냈다. 4년 뒤인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의병을 모았으나 흐지부지해지자 해산하고 의곡을 관청에 헌납했다.
함재 기효증
호남의 대학자 기대승의 아들인 기효증은 임란이 발발하자 의주 행재소와 의병에게 보낼 군량을 모으기 위해 나주에 의곡청을 설치했다. 의곡장에 추대된 뒤 의곡을 2섬 단위로 헌납하도록 하고 모아진 의곡은 영광의 법성포와 나주의 영산포, 전북은 군산포에서 적재하도록 하는 등 구체적이고 세밀한 통문을 각지에 보냈다. 6월 말까지 무려 3,000여 석의 의곡과 이를 운반할 400여 명의 의병을 모은 효증은 11월 1일 군산포에서 수백척의 선단에 이를 싣고 출발했다. 이순신의 보호를 받으며, 1593년 2월 1일 군산포를 떠난지 3개월만에 의주에 도착했다. 의곡 3,200석, 의병 460명, 콩 50석, 조 50석 등이 도착하면서 의주행재소가 활기를 되찾고 근위대 역시 그 위세를 회복했다. 2월 3일 선조는 동복현감에 제수하고 형조정랑과 군기사첨정에 임명했으나 사양하고 귀향했다.
1593년 11월 김덕령이 거병하자 의병과 식량 모아 보냈으나 덕령이 옥사했다는 소식에 실망한 후 광산구 임곡에 있는 아버지 기대승의 묘소 옆에 칠송정을 짓고 은둔했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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