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비엔날레 전시공간을 찾아서 <2>양림동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
유리로 둘러싸인 전시장으로 들어서자 독특한 향기가 먼저 다가온다. 흰색 둥근 좌대에 전시돼 있는 건 ‘어떤 날짜’가 적힌 꼬리표를 단 수십개의 돌멩이들. 향기의 진원지는 바로 제주에서 건너온 이 37개의 화산석이다. 잔잔한 소리가 깔린 전시장에 돌멩이와 함께 놓인 건 누군가가 기록한 ‘일기’다. ‘1948년 2월 8일’ 꼬리표가 달린 화산석을 들고서 바로 ‘그날’의 일기를 조용히 읽어본다. 제주 4·3항쟁이 일어나기 불과 2개월 전의 이야기다. 제13회 광주비엔날레 참여작가 시셀 톨라스의 ‘EQ_IQ_EQ’는 청각, 시각, 후각이 어우러진 색다른 경험을 통해 역사의 한 순간으로 관람객을 데려간다.
‘떠오르는 마음, 맞이하는 영혼’을 주제로 열리고 있는 올해 비엔날레는 광주시 남구 양림동을 비엔날레 역사상 처음으로 전시공간으로 선택했다. 선교사들의 차고지와 언더우드 선교사 사택을 리노베이션한 호랑가시나무아트폴리곤과 글라스폴리곤은 매력적인 전시장소로, 5명의 참여작가는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는 중이다.
냄새 연구가이자 화학자인 시셀 톨라스는 개인과 공동체의 감성과 지성을 탐색해왔다.
이번 비엔날레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던 작가는 4·3항쟁 등 제주 역사와 영적 유산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이번에 전시된 ‘일기’는 1948년부터 2020년까지 70년간 매일 수기와 삽화로 자신의 삶을 기록해온 제주도민 양신하의 흔적이다. 4·3을 관통하며 현재까지 이어진 그의 기록은 개인의 역사임과 동시에 공동체적인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고, 자연스레 남은 자의 연대를 이야기한다. 작가는 37개의 일기를 선택했고, 37개의 화산석에 나노분자를 심어 냄새를 입혔다. 관람객들은 향기나는 돌을 들고, 꼬리표에 달린 날짜의 일기를 읽으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다.
아트폴리곤에서 만나는 코라크리트 아루나논드차이의 ‘죽음을 위한 노래’는 설치미술과 영상으로 이뤄진 작품으로 신발을 벗고 들어가 대형 방석 위에 앉거나 누워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푸른빛이 감도는 전시실에는 태국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대형 노랑 오리 보트와 영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고유 의상, 마른 꽃잎, 대형 그림 등이 어우러져 있다.
태국에서 계속 진행중인 민주화 시위, 직접 방문해 접한 제주 4·3항쟁의 추모 행사, 필리핀의 민주적 저항 등에서 접한 억압받는 자들을 위로하고, 남아있는 이들이 전하는 ‘애도의 작업’을 팝송 ‘Can’t help falling in love’ 등 다양한 음악과 영상으로 보여준다. ‘새로운 세상을 위한 백만가지 꿈을 갖고 있다’는 내레이션, 서로 맞잡은 손, 혼령을 위로하는 주술적 행위 등이 어우러진 작품은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며 때론 숙연해지고, 때론 치유의 기운을 한껏 받는다. 30분 분량의 영상은 조금 긴 편이지만 이미 관람한 이들이 ‘놓치면 후회할 작품’으로 꼽고 있으니 꼭 감상할 것.
파트리샤 도밍게스는 글라스폴리곤 지하 공간을 활용해 ‘어머니의 드론’ 등 여러점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오래전 선교사가 머물던 생활공간인 터라 방, 화장실 등 공간마다 영상 작품을 비롯해 돌, 원주민의 의상과 가발, 마른 꽃 등 다양한 오브제를 활용한 설치 작품을 전시중이다. 볼리비아 열대 우림 화재 발생시 세워진 동물보호소에서 봉사했던 작가는 남아메리카 토착 원주민의 삶을 애도하고, 칠레 산티아고 시위대를 감시하는 경찰을 고발하는 작품 등으로 관람객을 만난다.
그밖에 사헤지 라할은 여러 세대를 거쳐 왜곡된 전설들, 디스토피아 미래에서 건너온 괴수들의 모습을 담은 드로잉을 선보이고 있으며 비엔날레 본전시관에서 ‘행렬’ 등을 선보이고 있는 감상돈 작가의 설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지금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 일대는 연두빛 싹을 틔우기 시작한 나무와 튤립, 철쭉 등 온갖 봄꽃이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하고 있어 봄나들이로도 제격이다. 무료 관람. 월요일 휴관이며 전시관람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30분까지다.
/글·사진=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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