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여년 전 13살이던 소녀는 이번 설만 지나면 아흔을 넘는, ‘망백’(望百)이다.
떨어지는 꽃잎만 봐도 웃었던 소녀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얼굴에 깊게 페인 주름엔 고단한 인생이 고스란히 담겼다.
초등학교 6학년때인 1944년, 돈을 많이 벌 수 있고 거기에서 학교도 갈 수 있다는 교장 선생님 말을 철썩같이 믿고 바다 건너 일본 나고야로 향했다.
소녀가 도착한 곳은 나고야 미쓰비시중공업 항공기 제작소. 매일 힘들고 가혹한 일만 강제로 해야했다. 돈도 받지 못했고 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그토록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또 다른 멸시의 손가락질을 받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90) 할머니 이야기다.
1931년생, 일주일여 뒤면 90번째 맞는 설이지만 양금덕 할머니는 도통 반갑지가 않다. 그토록 원하던 일본의 사과를 받지 못한 채 한 해를 흘려보냈다는 생각에 억울하고 원통하기만 하다.
꼭 살아서 사과를 받자며 굳게 약속했던 친구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남아있는 동료들도 손으로 꼽는다.
자신도 언제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일본 정부 태도를 보면 달라질 것 같지도 않다.
양금덕 할머니는 “원통하기만 할까. 곧 음력으로 설을 쇠면 아흔 한 살이야. 살아서 사과받고 죽을 수 있을려나 몰라”고 했다. 할머니는 “다들 늙었어. 살아있는 사람들도 별루 없고. 빨리 사죄 받고 싶기만 한데…”라며 “ 힘 없는 우리가 뭘 할 수 있어. (사죄와 배상이 되려면)정부가 적극적으로 해야지”라고 말했다. 대법원이 판단을 내려도 달라지지 않고 있는 상황을 감안, 정부가 일본 정부와 일본기업들의 사죄를 이끌어낼 수 있는 조치를 취해줬으면 하는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2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에 따르면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과 미쓰비시 머트리얼 등 일본기업 11곳을 상대로 강제동원된 광주·전남 피해자는 98명. 생존자는 양금덕 할머니를 비롯, 박해옥·김성주·김재림·김영옥·양용수·정신영·주금용·조동선 어르신 등 9명에 불과하다.
건강도 좋지 못하다. 대부분이 요양원에 머물고 있으며 홀로 거동하는 게 불가능하다.
아흔을 앞두고 있는 생존자들 상황과 건강 상태 등을 고려하면 일제 강제동원 기업들의 사죄를 받아내기 위한 실효성 있는 조치가 시급한 이유이기도 하다. 순탄치는 않다.
대법원이 지난 2018년 양금덕 할머니 등 징용 피해자 5명이 미쓰비시 측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피고는 1인당 1억∼1억 50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선고하는 등 2건의 징용 관련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모두 원고 승소 판결을 했지만 후속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미쓰비시 중공업 측은 오히려 법원이 공시송달을 통해 내린 특허권·상표권 압류명령에 대해 즉시항고장을 냈다. 이대로라면 설을 쇠고 새해를 맞아도 희망섞인 소식을 기대하기 쉽지 않다.
이국언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대표는 “1~2년을 장담할 수 없는 생존자 분들을 위해 남아있는 소송에 집중하면서 더 늦기 전에 어르신들 경험과 기억의 역사를 전승하는 방안 마련중”이라고 말했다.
/김민석 기자 ms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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