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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담긴 세상

[서효인의 ‘소설처럼’] 서러운 역사를 읽다 -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by 광주일보 2021.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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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에는 ‘계관시인’이라는 게 있다. 미국에서는 매해 계관시인이 새롭게 지정되며 특별한 의무는 없다. 하지만 그들의 시가 국가의 중요 행사에 쓰이곤 한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한 시대를 대표한 시인에게 월계관을 씌워 존경을 표하던 전통이 지금까지 계승된 셈이다.

시인에게 월계관은 특별한 지위나 권력이라기보다는 그 시대의 언어를 대변하고 세계의 정서를 표현해야 한다는 부담스러운 권한에 가까울 것이다. 온갖 매체와 소셜미디어에서 각각의 목소리가 모두 다른 소리를 내는 작금이기에 계관시인의 존재와 역할은 그마저 더욱 축소될 수밖에 없다. 그 어떤 시가 2020년의 혼란을 함축하겠는가. 그 어떤 시인이 2021년의 군상을 예감하겠는가. 오늘날의 시인은 그런 일을 하지 못한다. 아니, 하지 않는다.

무지한 혼란과 몽매한 군상 사이에서 가까스로 탄생한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전통의 끄트머리를 조금이나마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취임식과 달리 인파 없이 정부의 고위 관계자만 참석할 수 있었던 취임식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청년 계관시인 어맨다 고먼이 쓰고 낭독한 시 ‘우리가 오르는 언덕’(The Hill We Climb)에서 그 전통의 일단을 본 것이다.

시위대가 국회의사당에 난입했을 때 완성되었다는 이 시는 어렵지 않은 단어와 리드미컬한 운율로 지금 여기에 필요한 메시지를 적절하고 절절하게 전달했다. 취임식 이후 젊은 시인은 일약 유명인이 되었고, 그날의 패션 소품은 일거에 품절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앞으로 오래 남을 것은 아래와 같은 구절이다. “우리에게 빛을 바라보고, 빛이 될 용기가 있다면 빛은 항상 존재할 것이다.”

우리에게도 계관시인이라 부를 수 있는 시인이 몇 있었다. 윤동주의 ‘서시’는 우리가 간직한 영원한 청년의 표상이 되었다. 김수영의 ‘풀’은 근대사의 매몰찬 광풍 속에서도 꿋꿋했던 민중을 기리는 시가 되었다. 한용운, 이상, 기형도, 최승자도 누군가에게는 그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 백석을 꼽지 않을 수가 없다.

‘기행’이 본명인 시인은 그의 본명대로 해방 전 여러 곳에 거처하다 해방 후 고향인 평안도 정주에 머문다. 월북이 아닌 ‘귀북’ 시인이 된 백석의 작품은 바로 그 이유로 오랜 기간 금서가 되었고, 1987년이 되어서야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지금 백석은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 되었으며,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를 모르는 시 독자는 아마도 간첩일 것이다.

간첩이라니……. 분단을 상징하는 음습한 단어가 일종의 속담처럼 널리 쓰이게 된 사회에서 우리는 산다. 우리는 분단 때문에 오랫동안 백석의 시를 읽지 못했으나 북한의 독자는 백석의 시를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백석은 해방과 전쟁 이후에도 노년까지 비교적 건강하게 살았다. 그러나 시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지는 못했다고 알려져 있다. 오히려 모종의 이유로 시를 쓰지 못하였고, 집단 농장에서 육체노동을 하며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국수’ ‘모닥불’ ‘여우난골족’ ‘흰 바람벽이 있어’와 같은 아름다운 시를 남겼던 백석의 생애 후반기 대부분은 시인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 시절 백석의 삶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김연수 작가의 장편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은 그 마지막 시기의 백석을 다룬다. ‘기행’으로 지칭되는 시인은 한국어를 쓰는 계관시인이 될 수 없었다. 남쪽에서는 없는 사람이었고, 북쪽에서는 문제적 시인이 되었다. 체제가 결정하고 국가가 감시하는 창작 여건에 백석은 적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찬양시’를 쓸 수 없었다. 찬양시를 쓰는 순간 그는 그가 생각하는 시인이 아니게 되었다.

백석은 자신의 머리에 월계관을 씌우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그의 아름다운 시에서 썼던 것처럼 백석은 ‘세상을 더러워서 버리는’ 듯하다. 아니 그런 세상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저 삶을 이어 갔던 것일지도. 그저 그는 시를 쓰고 싶었고, 시를 보여 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가 시에 대해 생각하는 마음에 비해 이 세계는 작고 초라해 보인다. 더럽고 유치하게 느껴진다.

시는 그런 세상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동시에 애써 외면한다. 손을 뻗어 개입하는 동시에 외따로 떨어져 옆에 앉는다. 어떤 시든 시를 읽는 이에게는 ‘빛을 바라보고 빛이 될 용기’가 있으리라 믿는다. 오늘 밤 한 줌의 용기를 얻기 위해 백석을 읽어야겠다. ‘몽둥발이(딸려 붙었던 것이 다 떨어지고 몸뚱이만 남은 물건)가 된 서러운 역사’를 읽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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