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이 이제 맛이 들었다. 굴은 남해 기준으로 보통 10월 중순에 판매가 시작되지만, 날이 추워져야 맛이 오른다. 12월 초순만 해도 수온이 보통 10도 안팎에 불과하기에, 품질이 올라가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바닷물 수온은 육상 기온보다 늦게 떨어지므로, 맹추위가 와야 진짜 굴 철이라고 볼 수 있겠다.
올해 굴은 대체로 상황이 좋지 않다. 비가 많이 오면 염도가 낮아지기 때문이다. 수온도 늦게 떨어졌다고 한다. 게다가 노로 바이러스 뉴스가 나오면서 굴 양식을 하는 어민들이 화가 많이 났다.
굴은 해안을 낀 곳이라면 거의 전국에서 나오지만, 서해안은 생산성이 낮은 편이다. 조수간만 차가 커서 굴이 자잘하다. 그 덕에 독특한 맛을 내기도 하지만, 남해에 비해 노동력이 많이 든다. 기계화도 어렵다. 투석식이라고 하여, 갯벌에 돌을 두고 거기에 굴을 붙이거나 이미 붙어서 자라는 굴을 따기 때문이다. 맛은 함초롬하니 깊다고 한다.
기호의 차이일 수 있는데 이런 굴도 맛있고, 남해 통영이나 거제쪽에서 주로 하는 수하식도 좋다. 통영에서 고흥 방향으로 가면 점차 조수간만에 따라 노출되는 갯벌을 가진 지형이 도드라지기 시작한다. 이곳은 서해와 남해의 동쪽과는 또 다른 굴이 난다. 알은 서해안보다 굵고 통영 쪽보다는 잘다. 통영 쪽의 굴이 ‘우유’ 같은 유제품처럼 풍만한 맛을 낸다면, 이쪽은 차지고 진하다.
매년 이 무렵이면 고흥 바다로 후배들과 재료 탐구 여행을 간다. 올해는 코로나 상황으로 여의치 않아서, 시간을 더 미루지 않고 11월말에 일찌감치 다녀왔다. 거래처인 모 업체를 갔더니 사장님이 울상이다. 역시나 굴이 별로란다. ‘쭉정이’가 많다는 것이다. 패각 안에 굴이 안 들었다는 뜻이다. 이 업체는 2년생 이상 굴을 크게 길러서 진하면서도 풍부한 맛을 내기 때문에, 특별한 거래처로 서울 요리사들에게 각광을 받는 곳이다.
그래도 고흥의 맛인 피굴 맛은 보고 가자고 했다. 피굴을 상시로 파는 집은 점점 드물어진다. 미리 전화해서 예약해야 한다. 온갖 굴 요리가 다 있는 대형 소비처인 서울에서, 희한하게도 피굴을 파는 집은 없는 듯하다. 굴을 잘 씻어서 껍질째 삶아서 알을 추려 두고, 그 삶은 물을 여러 번 받쳐서 맑게 걸러야 한다. 손이 많이 가는데, 굴이 워낙 싸다 보니 값을 못받아서일까, 파는 집을 찾기 어렵다. 고흥에서조차 드물어졌으니,
뽀얀 젖빛보다는 조금 더 맑은, 두어 번 헹군 쌀뜨물처럼 반투명한 국물이 마음에 든다. 굴 삶은 물은 결코 하얀색이 아니다. 나는 그걸 청자색이라고 생각한다. 흥미롭게도 요 근동은 도자기의 고장이기도 하다. 푸른 듯, 맑은 구름색을 띤 피굴 국물을 마셨다. 이 음식은 숟가락으로 떠먹는 음식이 아니다. 노동 후 음식처럼, 쭉 들이켜는 음식 같다. 건더기를 먹고, 농주도 한 잔 마시고.
고흥은 수도권 기준으로 보면 먼 곳이다. 여수·목포·부산·울산도 다 먼 땅이지만 고속철도의 개통으로 훨씬 가까워졌다. 고흥은 그야말로 반도의 발치다. 여수와 다리로 이어지면서 여러 가지 접근 옵션이 생겼으나 여전히 멀긴 멀다. 하지만 그것이 주는 장점도 많다. 조용하고 포근하다. 인심이 요란하지 않으면서 깊다.
저녁을 먹고 시내를 걷다가 출출해서 한 중국집에 들렀다. 모든 재료가 국산. 게다가 김치를 주는데, 이게 묵은지다. 남쪽은 김장이 늦어서 아직 묵은지를 낸다고 한다. 중국집에서 묵은지라니, 이런 횡재가 어디 있냐고 일행들이 반겼다.
짬뽕도 옛날식으로 구수하다. 고기를 넣어 볶은 것이다. 60~70년대까지 널리 쓰이다가 해산물 짬뽕이 대세가 되면서 거의 사라진 조리법이다. 돼지 안심이나 등심을 얇게 저며 채소와 볶는 것인데, 그 깊이는 아주 오래된 중국 요리를 만나는 것 같다. 목포의 중국집에서 흔한 단무지와 양파 말고도 두 가지 김치를 주는 것을 보고는 놀라워했는데, 고흥에서 묵은지라니.
멀고 멀어서 가치가 지켜진달까. 세상은 한쪽으로 기우는 것만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번쩍 드는 남도 여행이었다. 그 내면에는 우리를 괴롭히는 복잡한 당면 문제들, 이를테면 균형 발전이나 노령화로 소멸 위기를 맞은 지역의 암울한 미래가 있겠지만…. 쌉쌀한 마음을 추스르며, 새 봄을 기다린다. 아아, 이 겨울은 참 길어질 것 같다. <음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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