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로스가 1973년 출간한 장편소설 ‘위대한 미국 소설’의 원제는 ‘The Great American Novel’이다. 말 그대로 위대한 미국 소설이라는 뜻으로서, 미국의 총체성을 뚜렷하게 밝히는, 그리하여 역사에 남게 된 소설을 일컫는 용어로 쓰인다. 예를 들어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 허먼 멜빌의 ‘모비 딕’,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자’ 같은 작품을 ‘위대한 미국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소설은 그러니까 배짱 좋은 신인 투수처럼(1973년은 위대한 소설가 필립 로스가 40세 청년이던 시절이었다.) 소설 제목 자체를 ‘The Great American Novel’로 내놓은 것이다. 졸작이거나 평작 아니, 그럭저럭 훌륭한 작품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제목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는 어디서 온 것일까?
‘위대한 미국 소설’은 스케일이 상당한 유머로 제목의 육중함을 돌파해 나간다. 치매 환자인 게 분명해 보이는 노인 스미티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야구 리그에 대한 기억이 있다. 그것은 패트리어트 리그. 애국자의 리그라는 심상치 않은 이름의 야구 단체는 지금 메이저리그의 양대 리그인 아메리칸리그와 내셔널리그와 다를 바 없이, 수많은 야구 단체를 거느리고 숱한 경기를 치르며 몇몇 스타를 탄생시킨다.
소설 밖 우리는 그런 리그란 역사상 없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박찬호 이후 류현진에 이르기까지 많은 야구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애국’적인 활약을 펼친 이유로 미국의 야구 또한 우리 삶과 그렇게 동떨어진 공놀이에 불과한 것은 아니게 되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스미티의 기억에서 재생되는 패트리어트 리그의 스타와 기록, 선수와 구단 관계자들의 이야기가 더욱 천연덕스럽게 느껴진다. 소설의 중반부에 접어들어 독자는 어느새 패트리어트리그의 팬이 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런데, 사라진 것이다. 리그의 기록도, 리그의 사람도, 리그가 가졌던 그 모든 것이.
필립 로스는 그의 대표작에서 누누이 보여 준 것처럼 미국이란 사회의 부조리와 집단이 형성하는 기억과 상처를 과감한 스케일로 다룬다. 사람이 사라지고 다치고 죽는 비극을, 그 모든 기억이 말끔하게 사라지는 희극으로 바꿈으로써, 다시 엄청난 비극적 이야기로 독자를 내몬다. ‘위대한 미국 소설’은 야구 소설이지만 미국 소설이자 미국의 자본주의에 대한 소설이다. 미국이 만들어낸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이자 현재 미국을 이해하는 키워드가 되는 소설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게 야구를 이야기함으로써 가능한 셈이다. 야구 이야기는 곧 미국의 이야기가 된다. 대공황과 2차세계대전과 파시즘의 광풍까지, 야구 이야기는 마치 야구의 기록처럼 소설이 됨으로써 기록한다. 필립 로스는 야구광이자 기록의 제왕이고, 그것을 합쳐 미국 소설의 대가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에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우리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세계에 몇 되지 않는 야구를 즐기는 나라 중 하나이며 미국과 또한 마찬가지로 역사적 사건의 흐름에 야구는 빠지지 않고 혼재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야구가 곧바로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우리의 야구 대부분을 기억한다. 특히 호남인들에게 야구는 현대사의 다른 이름과 다름이 아니어서 필립 로스의 소설처럼 1980년대 해태 야구는 여러 장르를 통해 극화되기도 했었다. 당시의 야구는 (어쩌면 지금까지도) ‘위대한 미국 소설’에 등장하는 유태인 구단주 혹은 흑인 프로선수처럼 존재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호남과 호남인이 집단적 상흔을 야구를 통해 표출하고 위안 받으며, 한 시절을 함께 보냈음을 완전히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프로야구가 전두환 정권에 의해 탄생하였음은 익히 잘 알려진 아이러니다. 그리고 죄를 지은 권력자는 버젓한 사실을 기억에서 지워 버리려는 습성이 있다. 필립 로스가 그린 미국에서는 ‘패트리어트 리그’가 그랬고, 전두환이 여태 살아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 5월이 그렇다. 최근에도 전두환은 그날 헬기 총격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여전히 우리는 발포 책임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아마도 그것은 당시의 최고 권력자인 전두환이 아닐 수가 없기도 하겠으나, 법적으로 확정하지는 못했다. 그런 우리더러 들으라는 듯이 필립 로스는 스미티의 입을 빌어 이렇게 썼다. “예술을 위한 예술 혹은 국민의 자긍심이나 개인의 유명세를 위한 예술이 아니라, 기록을 위한 예술, 모든 말로 진실을 왜곡하고 배신하는 자들로부터 현재와 과거의 진실을 되찾아 오는 예술”을 쓰겠노라고. 이 소설의 제목이 단박에 정당해지는 순간이었다.
'글에 담긴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찬일의 ‘밥먹고 합시다’] 피굴과 묵은지 (0) | 2020.12.19 |
---|---|
[이덕일의 ‘역사의 창’] 검찰과 공수처 (0) | 2020.12.13 |
[박찬일의 ‘밥 먹고 합시다’] 대폿집 기행 (0) | 2020.10.22 |
[서효인의 소설처럼] 치유의 소설 , 김금희 ‘복자에게’ (0) | 2020.10.11 |
[고규홍의 ‘나무 생각’] 개발 이익의 희생물이 된 나무 (0) | 2020.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