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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담긴 세상

[박찬일의 ‘밥 먹고 합시다’] 대폿집 기행

by 광주일보 2020.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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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허영만 선생이 출연해서 인기를 끌고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 백반집을 다니는 일인데, 꼭 백반집 말고도 대폿집이며 일반 식당이며 두루 다닌다. 백반집은 누구나 좋아하는 밥집이고, 그걸 방송으로 내보내니 인기도 높다.

언젠가 한 출판업자가 책을 같이 내 보자고 해서 대폿집을 주제로 하자고 한 적이 있다. 그리하여 한두 집 다니던 것이 꽤 이력이 쌓였다. 책이란 것도 일이고, 노동을 팔아서 돈과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백반집·대폿집 다니는 건 일종의 취미다. 시간이 나면 책을 내겠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좋아서 다녔다. 흥미로운 집들이 꽤 많았다.

광주는 시장이 아직 무너지지 않은 지역이다. 많은 지역의 재래시장이 거의 몰락의 길을 걷는데 그나마 광주는 버티는 중이다. 한 시장에 ‘여수왕대포’라는 집이 있다. 닭전 끝에, 검색도 안 되는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 밥집이다. 밥집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 중 하나는, 손님이 줄면서 안줏거리를 잘 못 갖춘다는 것이다. 언제 손님이 올지, 오더라도 안주를 제대로 시킬지 알 수 없는 일이므로, 냉동 말고는 질 좋은 재료를 갖추고 있기 힘들다. 여수왕대포는 다행히도 시장 안에 있어서 언제든 재료를 사 댈 수 있다. 시장 술집들이 그나마 괜찮은 제철 안주를 받아들 가능성이 높은 까닭이다.

아예 나만의 노하우도 생겼는데, 미리 여쭈는 것이다. 혹시 먹고 싶은 재료를 사서 가져가도 됩니까, 하고. 물론 합당한 공임을 드려야 하는 일이다. 그렇게 여수왕대포의 시간이 축적됐다. 계절마다 다른 재료를, 가게가 있는 시장의 좌판에서 산다. 봄에는 시금치며 산나물도 사고 병어와 주꾸미도 산다. 가을에는 고등어와 낙지를 사고 계절과는 상관없는 돼지고기를 한 근 끊기도 한다. 일부러 넉넉히 사고 “이놈 다 하지 말고 반은 아짐 드세요”한다. 그랬는데도 기어이 안주는 푸짐해지고, 서울에서는 맛보기 힘든 ‘지역 막걸리’와 ‘지역 소주’에 잠시 맛있게 쉬어 가게 된다.

묵은지가 나오는 것도 할매나 아짐들이 운영하는 대폿집의 특징이다. 요새 서울 어디에서 자기가 담근 묵은지를 내준단 말인가. 이런 백반집에 갈 때는 미리 전화를 한다. 언제 아주머니가 아파서 문을 닫을지, 잠시 임시로 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냥 갔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여수왕대포의 아짐은, 헤어질 때는 늘 우신다. 잘 먹고 돌아서면서 늘 가슴이 아픈 이유다. 그 아짐 연세나 행색이나 마음이 딱 우리 어머니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일부러 비싼 기찻삯 물어 가며 가는 건 이런 인정과 맛 때문이다. 이런 집들이 과연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사실 비관적이다. 번듯한 식당도 픽픽 쓰러지고, 이윤도 안 나서 문을 닫는 판에 누가 이런 대폿집 대를 이을 리가 있겠는가.

구례 읍내에 있는 동아식당도 오래 다닌 대폿집이다. 대폿집 풍경 가운데 참으로 멋진 건 한두 잔씩 잔술을 파는 것이다. 잔술은 노동주다. 일하다가 힘들어서 한 잔, 일 끝나서 한 잔, 그렇게 마시고 퇴근하는 사람들의 술이다. 으레 마시는 술이니 안주도 없고, 그저 주인 아짐이 내주는 김치나 반찬 한두 가지에 마시는 막걸리다. 잔술도, 공짜 안주도 거의 없는 서울이니, 이런 광경은 보는 것만으로도 흥겹다. 물론 서울도 예전엔 잔술 문화가 꽤 있었다. 시장에서는 언제든 잔술을 팔았고, 김치보시기 정도는 그냥 냈다. 지금도 중구 중부시장이나 낙원동, 종묘 순라길 같은 곳에는 남아 있는 문화다. 하지만 서울 전체적으로는 사라지고 말았다.

군산은 마산·통영 같은 해안도시가 대개 그렇듯이 술을 한 병 시키면 안주가 딸려 나오는 풍습이 있다. 개명(?)된 시대가 되면서 이런 미풍양속이랄까, 술꾼들을 흥분시키는 재미있는 술집도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군산도 예외는 아니어서 몇몇 집만 맥을 잇고 있는 듯하다. 그중 시내 시장에 있는 ‘홍집’이라는 곳이 흥미롭다. 이 집도 술을 한 병 시키면 안주가 나오고, 병 수가 올라가면 더 진한(?) 안주가 나온다. 가게 한 구석, 낡은 아이스박스에 담긴 막걸리며 소주·맥주를 직접 집어 들어다가 먹는 것도 재미다. 나중에 탁자 위의 병을 헤아리면 그만이다.

이집 주인 아짐은 간다고 전화해도 여름엔 오지 말라고 한다. ‘여름엔 먹을 것이 없어’ 하시면서. 말은 그래도 늘 한 상 차려 내는데 예의 묵은지도 나온다. “가을에 오면 참 좋을 것인디, 삼치도 있고 먹갈치도 좋고 낙지도 맛있을 것인디” 하시며 아쉬워하신다. 해안도시는 가을과 겨울이 좋은 철이다. 갯벌과 바다에서 풍성하게 먹을거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바람이 차다. 군산이든 광주든 충청도 어디이든, 대폿집을 다시 가야겠다. 돌아올 때 아짐들의 눈물 바람이 괴롭긴 하지만.

<음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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