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유채꽃 ‘만발’…나들이객으로 ‘북적’
<선학동 나그네>가 머문 선학동마을
문학길과 어우러진 설레는 꽃길 여행
“남도 땅 장흥(長興)에서도 한참 들어간 회진(會鎭)이라는 곳에서 버스를 내린, 나이는 쉰 살 정도이고 피곤기가 어린 표정과 허름한 몰골을 지닌 한 사내가 선학동 쪽으로 급히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 사내는 해 안으로 선학동을 보겠다는 일념뿐이다. 선학동과 선학동을 감싸안고 뻗어 내린 물 건너 산자락을, 그 선학동 산자락을 거울처럼 비춰 올릴 선학동 포구의 만조를 놓치지 말아야 했다.” - 고 이청준 작가 <선학동 나그네> 중
장흥 회진에서 마지막 산모퉁이를 올라서서 다시 오른쪽으로 길게 뻗어 들어간 포구의 물길이 시원하게 펼쳐진 곳. 장삼자락을 길게 벌려 마을을 싸안은 모습이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신비스런 선학(仙鶴)의 자태를 간직한 마을이 있다. 그래서일까. 마을 이름도 선학동이다. 원래 이름은 산 아래 마을이라고 하여 ‘산저’로 불렸는데 현대문학의 거장 고 이청준 작가의 소설 <선학동 나그네>의 배경지가 되면서 마을 이름까지 바뀌었다.
신선들과 벗하며 산다 해서 붙여진 선학(仙鶴)이라는 이름처럼 마을 풍경이 고고하고 청초하기 그지없다. 마을 어귀에 서서 날아오르는 학의 모습을 닮은 관음봉을 뒤로 하고 탁 트인 득량만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소란스러운 마음까지 평안해진다. 일 년 열두 달 언제 찾아도 근사한 풍경을 선사하는 곳. 계절의 여왕 5월을 맞아 선학동마을에서는 유채꽃이 한창이다.
유채는 동백을 시작으로 산수유, 매화, 벚꽃에 이어 봄을 상징하는 꽃이다. 유채꽃 명소로 유명한 제주에서는 3월이 유채꽃 시즌이지만 장흥은 다르다. 화려함을 뽐내던 전국의 유채가 모두 사라진 5월, 선학동마을의 유채꽃은 호시절을 맞는다. 한겨울 냉해를 피하기 위해 다른 지역보다 2~3주가량 파종 시기를 늦춘 덕분에 5월 중순부터 유채꽃이 절정이다. 마을 전체를 뒤덮은 유채꽃밭은 약 20헥타 규모로 어떤 길을 선택하든지 유채꽃 구경을 마음껏 할 수 있다. 상춘객들이 가장 사랑하는 길은 마을 입구에서 뒷산 전망대까지 이어진 약 200미터의 오르막길로 쪽빛 바다와 샛노란 유채꽃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명품 산책로다. 선학이 노니는 무릉도원이 이런 모습일까. 득량만 바다를 바라보는 산자락을 따라 주변 들녘이 온통 샛노란 물결로 일렁이면 쪽빛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눈길 닿는 곳마다 한 폭의 그림이 펼쳐진다.
선학동마을에는 고 이청준 작가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문학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일명 ‘이청준 소설 문학길’로 불리는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영화 세트장이 눈에 들어온다. 임권택 감독이 이청준 작가의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 <천년학>의 세트장이다.
마을 입구에서 500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위치한 <천년학> 촬영지는 선학동 마을과 득량만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작은 마을이다 보니 한 시간이면 마을 한바퀴를 돌아보기에 족하지만 봄의 정취를 느끼기에 결코 부족함이 없다. 여럿이 함께여도 좋고, 나 홀로 여행이라도 외롭지 않다.
사실 선학동마을이 유채꽃으로 유명해진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던 선학동은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서 비워둔 논과 밭에 보리를 심으려 했지만 정부의 보리 수매가 중단되면서 대체 작물인 유채를 심기 시작했다. 이후 해마다 유채꽃밭이 늘어나면서 선학동마을은 유채꽃 명소가 됐다. 선학동마을의 봄이 샛노란 유채꽃밭이라면 가을은 새하얀 메밀꽃밭으로 주인공이 바뀐다. 유채가 진 자리에 메밀을 파종해서 10월이면 새하얀 메밀꽃이 온 마을을 뒤덮는다. 선학동마을이 전국적인 관광지로 인기를 얻으면서 마을에서는 ‘금빛·은빛 가득한 선학동 마을’이라는 공식 사이트를 만들어 마을 알리기에 열심이다. 덕분에 ‘전남 행복마을 만들기 마을경관 환경분야 최우수상’ 수상, 한국관광공사 ‘봄 시즌 비대면 안심 관광지 25선’ 선정, SRT ‘올해 최고의 여행지 10곳’ 선정 등 많은 성과도 남겼다.
마을 앞에 펼쳐진 득량만 바다는 장흥과 보성, 강진이 맞닿아 있는 청정갯벌로 맛있는 먹거리가 넘쳐난다. 특히 보리 이삭이 여물기 시작하는 5월에는 키조개가 제철이다. 살집이 두툼하고 풍미가 뛰어난 키조개는 회, 전, 회무침 등 다양한 요리로 즐길 수 있는데 득량만 키조개에 한우와 표고버섯과 함께 구워먹는 장흥삼합은 전국 미식가들 사이에서 알아주는 특식이다. 키조개와 함께 제철 맞은 갑오징어와 쭈꾸미는 살짝 데쳐서 초고추장이나 참기름에 찍어 먹으면 그만이다. 철마다 맛난 먹거리를 내어주며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한 곳간. 얻을 ‘득(得)’에 양식 ‘량(糧)’이라는 이름이 괜히 붙여진 게 아니다.
/글·사진=정지효 기자 1018hyohy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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