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핵 개발 프로젝트’ 과학자의 생애와 심리를 그리다
OST 통해 극적 긴장감 극대화…영화 음악상 석권
‘핵 폭발’ 순간을 교향악으로 묘사해본다면 어떨까. 심벌즈 타격음이나 팀파니 연타, 튜바의 텅잉 등이 떠오르지만 ‘현악기’를 활용하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선택은 흥미롭다.
영화 ‘오펜하이머’ 16번 트랙 ‘트리니티’는 반복되는 현악 탄주로 공간감을 만든다. 광막한 사막에 홀로 선 듯한, 전에 없는 현의 감각은 낯설고 신기하다. 선율 악기인 바이올린의 멜로디를 활용하지 않고 그저 ‘기계적’ 반복음으로만 파토스를 남기다니, 무한 루프에 갇힌 현의 진동은 입자 가속기가 발하는 마찰음처럼 되풀이(da capo)되면서 관객들에게 나름의 의미로 가닿는다. 한편으로 공허하고 허무한 멜로디는 ‘핵’에 대한 메타포에 다름 아니다.
지난해 국내에서 323만 관객을 동원한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는 과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 분)가 이끌었던 핵 개발 실험인 ‘맨해튼 프로젝트’와 그의 생애, 심리를 초점화한 전기적 작품이다. 올 한해 영·미 아카데미 시상식, 크리틱스 초이스 및 골든 글로브 시상식 등에서 특히 ‘음악상’을 석권하면서 이목을 끌고 있다.
음악을 다룬 ‘무지카 시네마’가 아님에도 작품을 감상하며 귀가 열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품의 절반 가량이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시점인 흑백으로 처리됐기에 소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 등을 차치하고서도 말이다.
가장 먼저 청각을 가장 사로잡는 OST는 아마도 ‘Can you hear the music’일 것이다. 작중 오펜하이머는 “음악을 대수학처럼 읽기 보다, 들을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받는데 “그렇다”고 답한 뒤 울려 퍼지는 노래다.
거칠게 이어지는 레가토(legato·연음)와 악곡 말미에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페르마타(fermata·정지) 등은 악곡에 장엄함과 비장미를 더한다. 폭력을 멈추기 위해 더 큰 폭력을 만드는 오펜하이머 사단의 ‘내면적 스펙터클’을 형상화했기 때문인지 음율은 고르지 않다.
바이올린 속주로 시작해 더블 베이스의 중후한 음색으로 매조진다는 점도 구성의 묘. 고행 끝에 핵 개발에 성공했지만 그 또한 인류의 음악을 ‘읽어낸 것’일 뿐이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환유된다.
물론 ‘음악을 읽는다’는 행위는 편협한 내셔널리즘이나 공리주의, 국수주의 등을 벗어나지 못하고 ‘무력을 통해 일궈내는 평화’를 빗댄 것이리라. ‘F=F(힘만이 힘이다)’라는 냉전시대의 구호 아래에서 핵과학자들이 이룩하려는 ‘평화’는 과학의 윤리·가치중립성 등에 딜레마를 남긴다.
관객들은 스케르초풍의 격렬한 악곡 전개와 함께 비주얼의 ‘폭발’도 함께 경험한다. CG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전자들과 오비탈 모형, 터져 나오는 불꽃의 이미지 등은 오펜하이머의 분열(Fission)과 융합(Fussion)에 대한 환상곡과 같다. 시청각적 요소가 뒤섞인 영화적 화성(和聲)은 매카시즘 등에 경도된 불합리한 세계에 일침을 가하는, 가장 날카로운 교향악이다.
압권의 OST 중 하나인 8번 트랙 ‘맨하탄 프로젝트’도 관객들을 전율케 한다. 이 곡에는 핵 개발 프로그램 ‘맨하탄 프로젝트’가 좌초되지 않도록 과학자들을 규합하는 오펜하이머의 모습, 마치 ‘불씨’를 발견한 듯한 프로메테우스의 환희 등이 투사돼 있다. 바이올린 주 선율에 덧입혀진 신디사이저 음향을 듣고 있으면 인간의 거친 심박이 현의 진동으로 현현한 것만 같다.
악곡은 ‘아름다움’에서 ‘혼란’, 다시 혼란에서 ‘공포’로 나아가는 치밀한 변증법적 전개를 지닌다. 음악이기에 소나타 형식 등을 차용했다고 보는 것이 더 나을지도, 8번 트랙은 단촐한 오케스트레이션에도 불구하고 여느 풀 편성 오케스트라 못지 않은 고양감을 선사한다.
‘오펜하이머’에 삽입된 총 24편의 OST는 스웨덴 작곡가인 루드비히 고란손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고란손은 ‘블랙팬서’, ‘만달로리안’ 등 OST를 작곡해 온 실력자로 놀란 감독이 “바이올린을 베이스로 두고 작업해달라”는 요청을 염두에 두고 작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바깥에서도 이들은 예술적 감흥을 위해 자신들만의 ‘맨하탄 프로젝트’를 진행한 셈. 영화 밖 현실이 내부와 격자처럼 묶여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 미장아빔(Mise en abyme)이 떠오른다.
여섯 개의 정박 뒤 빠른 반박, 다시 두 개의 정박 뒤 빠른 반박자 이른 스트로크를 들을 수 있는 ‘Fusion’도 숨겨진 명곡이다. ‘Destroyer of Worlds’나 ‘Can you hear the music’ 등에 비해 관객들에게 사랑 받지는 못했으나, 여린박에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센박이나 박자를 뒤섞는 ‘우연성’ 등의 요소는 존 케이지의 그것과도 비슷해 보인다. 노력과 우연을 통해 탄생한 ‘핵’에 대한 비화를 음악으로 재현하다니 놀라울 뿐이다.
‘오펜하이머’의 음악도 좋지만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도 심오하다. 인류를 파멸 위기에 빠뜨리는 ‘악마’들은 결코 악의 얼굴을 하고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 히로시마 나가사키를 불태운 ‘팻 보이’와 ‘리틀 보이’도 일부 열강에겐 그저 꿈꾸는 ‘소년’(Boy)이자 ‘천사’의 얼굴이었을 것이라는 점은 공포를 선사한다. 이와 맞물려 영화는 일본 패망의 날을 깊게 다루지 않았는데 오펜하이머의 내면 심리에만 주안점을 두고 과학의 가치중립에 대해서는 관객들이 평가할 여지를 마련하려는 나름의 의도로 읽힌다.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오케스트라 연주를 멈추는 종결 표지 ‘코다’처럼 오른다. 영화와 음악을 끄고 지구 저편의 일을 생각해 본다. 중동에 4차 전쟁의 기류가 감돌고, 핵 보유국의 충돌인 우·러전쟁이 계속되는 한 ‘오펜하이머’의 선율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최류빈 기자 rub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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