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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만에 아버지 故(고)최병연씨 유해 봉환 앞둔 아들 금수씨
49일 된 아들 두고 1942년 타라와 전투에 끌려가 전사
‘타라와 전투’ 희생자 첫 유해 봉환…오늘 영광서 추도식
유족들 “정부, 강제동원 문제 피해자 입장서 다뤄줘야”
“평생을 그리워한 아버지의 유해라도 뵐 수 있어 다행입니다.”
일본에 의해 태평양 전쟁에 강제동원돼 80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故(고) 최병연(사망 당시 25세)씨의 차남 금수(82)씨의 울먹임이다.
영광군 홍농면 진덕리가 고향인 최씨는 1942년 11월 25일 남태평양 타라와 섬에 해군 군속으로 강제동원됐다.
최씨는 이듬해 11월 미군과의 전투인 타라와 전투(11월 20~23일)에서 일본군의 총알받이로 나섰다가 숨졌다. 최씨의 둘째 아들인 금수씨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사통지서’가 전부다. 금수씨가 태어난지 49일만에 강제징집돼 떠난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전해 들은 어머니가 종이를 끌어안고 오열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금수씨는 어머니, 첫째 형 향주(지난해 사망,86)씨와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았다.
금수씨는 “어머니가 밤새 베를 짜면 큰아버지가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었다”면서 “식량이 떨어져 형과 내가 굶주린 모습을 보던 어머니가 집 뒤뜰에서 숨죽여 울던 모습이 가슴에 사무치게 남아있다”고 회상했다.
가난 때문에 금수씨 형은 학교 월사금(月謝金·지금의 수업료)을 내지 못해 2년만에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금수씨도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학업을 중단했다 2년 후 다시 4학년으로 입학해 겨우 졸업했다.
금수씨는 몸이 힘들고 마음이 외로울 때마다 아버지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고 설명했다. 군복 입은 아버지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꺼내 보며 힘을 얻었다고 회상했다.그러면서 어머니가 홀로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왜 아버지가 없을까’ 하는 서러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 2019년 정부에서 아버지의 유해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은 금수씨는 희망에 들떴다고 한다.
정부가 타라와 전투에서 숨진 한국인 유해와 한국 유족 유전자(DNA)일치 확인 작업 결과 ‘타라와 46번’으로 불리던 유해가 형제의 DNA와 같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최씨는 “처음 아버지와 DNA가 일치한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는 믿기 어려웠다”며 “이후 관련 기관에 재차 확인한 후에야 유해라도 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고 웃어보였다.
하지만 금수씨는 “‘살아서 아버지의 유해를 보고싶다’며 유해 봉환을 적극 추진했던 형이 지난해 겨울 노환으로 타계해 아쉬움이 크다”고 말했다.
이어 “강제동원 문제는 현재진행형이고 여전히 많은 피해자들이 남아있다”며 “약소민들을 데려다 총알받이로 내세우고 강제징집한 것에 대한 일본의 배상은 당연하다.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 입장에서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타라와 강제동원 희생자 유해봉환 추도식’은 4일 오후 2시 영광문화예술의전당 대공연장에서 열린다. 추도식 이후 유해는 영광의 가족 선산에 안장된다. 타라와 전투에서 숨진 한국인 1117명 중 한국으로 유해가 돌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편 일제강제동원 시민모임은 이날 추도식 장소에서 일본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다.
타라와 전투(1942년)
태평양의 관문인 타라와 섬을 놓고 미·일이 벌인 전쟁이다. 일제는 타라와 섬을 요새화 하기 위해 수천명의 건설 인력을 동원했다. 소수 일본인 군속과 중국인을 제외하면 동원된 조선인은 1200여명에 달했으며, 대부분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영광 글·사진=김다인 기자 kdi@kwangju.co.kr
/영광=김창원 기자 kcw@kwangju.co.kr
일본에 의해 태평양 전쟁에 강제동원돼 80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故(고) 최병연(사망 당시 25세)씨의 차남 금수(82)씨의 울먹임이다.
영광군 홍농면 진덕리가 고향인 최씨는 1942년 11월 25일 남태평양 타라와 섬에 해군 군속으로 강제동원됐다.
최씨는 이듬해 11월 미군과의 전투인 타라와 전투(11월 20~23일)에서 일본군의 총알받이로 나섰다가 숨졌다. 최씨의 둘째 아들인 금수씨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사통지서’가 전부다. 금수씨가 태어난지 49일만에 강제징집돼 떠난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전해 들은 어머니가 종이를 끌어안고 오열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금수씨는 어머니, 첫째 형 향주(지난해 사망,86)씨와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았다.
금수씨는 “어머니가 밤새 베를 짜면 큰아버지가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었다”면서 “식량이 떨어져 형과 내가 굶주린 모습을 보던 어머니가 집 뒤뜰에서 숨죽여 울던 모습이 가슴에 사무치게 남아있다”고 회상했다.
가난 때문에 금수씨 형은 학교 월사금(月謝金·지금의 수업료)을 내지 못해 2년만에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금수씨도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학업을 중단했다 2년 후 다시 4학년으로 입학해 겨우 졸업했다.
금수씨는 몸이 힘들고 마음이 외로울 때마다 아버지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고 설명했다. 군복 입은 아버지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꺼내 보며 힘을 얻었다고 회상했다.그러면서 어머니가 홀로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왜 아버지가 없을까’ 하는 서러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 2019년 정부에서 아버지의 유해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은 금수씨는 희망에 들떴다고 한다.
정부가 타라와 전투에서 숨진 한국인 유해와 한국 유족 유전자(DNA)일치 확인 작업 결과 ‘타라와 46번’으로 불리던 유해가 형제의 DNA와 같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최씨는 “처음 아버지와 DNA가 일치한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는 믿기 어려웠다”며 “이후 관련 기관에 재차 확인한 후에야 유해라도 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고 웃어보였다.
하지만 금수씨는 “‘살아서 아버지의 유해를 보고싶다’며 유해 봉환을 적극 추진했던 형이 지난해 겨울 노환으로 타계해 아쉬움이 크다”고 말했다.
이어 “강제동원 문제는 현재진행형이고 여전히 많은 피해자들이 남아있다”며 “약소민들을 데려다 총알받이로 내세우고 강제징집한 것에 대한 일본의 배상은 당연하다.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 입장에서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타라와 강제동원 희생자 유해봉환 추도식’은 4일 오후 2시 영광문화예술의전당 대공연장에서 열린다. 추도식 이후 유해는 영광의 가족 선산에 안장된다. 타라와 전투에서 숨진 한국인 1117명 중 한국으로 유해가 돌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편 일제강제동원 시민모임은 이날 추도식 장소에서 일본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다.
타라와 전투(1942년)
태평양의 관문인 타라와 섬을 놓고 미·일이 벌인 전쟁이다. 일제는 타라와 섬을 요새화 하기 위해 수천명의 건설 인력을 동원했다. 소수 일본인 군속과 중국인을 제외하면 동원된 조선인은 1200여명에 달했으며, 대부분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영광 글·사진=김다인 기자 kdi@kwangju.co.kr
/영광=김창원 기자 kcw@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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