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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천기자

호남 누정-광주 <9> 환벽당

by 광주일보 2023.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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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름 사방에 두른’ 정자…당대 문인들 詩文 오롯이
사촌 김윤제가 고향 충효동 무등산 자락에 건립
충장공 김덕령 종조부이자 김성원·정철의 스승
정철·임억령·김인후·백광훈 등 교류 이어갔던 곳
식영정 · 소쇄원과 함께 ‘일동삼승’으로 명성

환벽당은 사촌(沙村) 김윤제가 퇴휴하고 자신의 고향인 충효동 무등산 자락에 지은 정자다.

한차례 비가 쏟아지고 나자, 운무가 자욱하다. 산과 천이 연한 곳이라 안개가 자주 이나 보다. 진경이 눈앞에 들어찬다. ‘푸르름이 사방에 가득한 집’이라는 맞춤한 뜻이 대략 가늠이 된다. 산과 들과 물이 하나에서 나온 듯 조화가 절묘하다.

불어오는 바람에 홑이불 같은 운무가 서서히 걷힌다. 환벽당(環碧堂). 사방이 푸르다. 눈에 닿는 모든 것들이 푸르다. 나무의 우듬지는 물론이거니와 비스듬한 언덕에 바투 앉은 바위도 푸르다. 실피리인 듯 들려오는 바람소리마저 푸르다. 주위의 녹음방천은 무릉을 떠올리게 하고 비 온 뒤 정경은 더욱 다감하다.

자연이 건네는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어디선가 아니 누군가 건네는 소리인 듯 하다. 세상의 번다한 소리에 귀를 닫을 것, 그리하여 마음의 귀를 열 것, 무념무상의 틈 새로 밀어와 같은 속삼임이 밀려온다. 산하가 건네는 말들에 슬며시 귀를 연다. 세상에 물든 어지러운 마음 버리고 푸른 생각, 맑은 사유로만 채우라는 뜻일 터.

환벽당으로 향하는 작은 문.

환벽당(環碧堂)은 사촌(沙村) 김윤제(1501~1572)가 지었다. 본관은 광산이며 자는 공노(恭老)다. 충장공 김덕령의 종조부이며 김성원과 정철 등의 스승이기도하다. 사촌은 중종 26년(1531년)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교리와 나주목사 등 지방관을 역임했다. 환벽당은 사촌이 퇴휴하고 자신의 고향인 충효동 무등산 자락에 지었다 한다. 한편으로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면서 지었다는 설도 있다.

정자 아래로 흐르는 내는 광주호의 상류 창계천이다. 계곡의 물소리가 비온 뒤 더 창랑하다. 귀를 씻는다는 말의 의미가 절로 이해가 된다. 무등의 품에서 발원해서인지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간다. 수려하지 않은데 수려함을 뛰어넘는다. 전라도 말로 ‘귄이 있는’ 풍경이다.

정자에서 바라본 풍경.

앞으로는 송강 정철의 가사 ‘성산별곡’(星山別曲)의 배경인 성산(星山)이 자리한다. 송강의 빛나는 절창은 스승인 사촌 김윤제에게서 배운 문장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환벽당은 송강이 벼슬길에 나아가기까지 유숙하며 공부를 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송강이 사촌의 외손녀와 결혼을 하고 무등의 자락에서 당대 유학자들과 교류하고 배움을 이어갔던 중심에는 환벽당이 있었다.

지금도 환벽당에는 송순을 비롯해 임억령, 김인후, 김성원, 백광훈 등의 제영(題詠)이 전한다. 문사와 명현들이 이곳을 드나들며 글월을 견주듯 풀어냈던 것은 자연이 베푼 은공과 무관치 않다.

창계천과 접하는 아래로 바위가 에둘러 있다. 의젓한 소나무 바로 밑이다. 모든 시름 놓고 시절을 낚기에 좋은 자리다. 이름을 조대(釣臺)라 한 연유가 절로 이해된다. 석천(石川) 임억령이 ‘식영정 20영’(息影亭二十詠)을 읊은 것 가운데 ‘조대쌍송’(釣臺雙松)이 있는데 그런 정취를 담고 있다 하겠다.

환벽당은 입구의 작은 문으로부터 시작된다. 범박하게 말하면 환벽당은 창계천과 충효동 뒷산 언덕배기와 인근의 자연을 이름한다. 누정 그 자체만이 아닌 일대의 승경까지도 아우른다.

실오라기 같은 다소 가파른 언덕을 올라 환벽당을 알현한다. 이끼가 낀 계단들은 하나의 쉼표처럼 박혀 있다. 숨을 쉬듯, 다리쉼을 하듯, 심회의 짐을 내려놓듯 그렇게 올라간다. 예전의 선비들이 올랐을 무등의 한 언덕이 시공을 넘어 실재의 공간으로 다가온다.

환벽당의 구조는 여느 정자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주위의 풍경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가운데 2칸은 방이며 전면과 측면 모두 마루로 에둘러 있다. 환벽당이라는 제액(題額)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또한 내부에는 석천 임억령과 조자이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맑은 냇가 모래밭의 잔잔한 물결

날개를 펼친 듯 누각은 배를 닮았네

밝은 달빛 아래서 피리를 부니

물속에 드리워진 용은 잠들지 못하겠거니

환벽당으로 이어지는 이끼 낀 돌계단들.

‘환벽영추’(環碧靈湫)

옛적의 선비는 환벽당과 주변의 풍광을 그렇게 노래했다. 시간의 흐름과 맞물려 당시의 지형은 다소 달라졌겠으나 정취는 유사할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대로’(大老), ‘송자’(宋子)와 같은 호칭으로 불리던 송시열이 환벽당을 편액했다는 사실이다. 환벽당 외에도 인근 소쇄원의 ‘제월당’을 비롯해 화순의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 등의 글씨가 우암의 것이라 전해온다. 송시열이 유학자로서의 김윤제의 학덕을 높이 평가했으리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정자 입구를 지키고 선 기품있는 소나무들.

천득염 한국학호남진흥원장은 “환벽당의 내력이 기록된 창건기나 중수기 등이 발견되지 않아 창건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면서도 “그럼에도 이곳을 출입했던 송순이나 임억령, 김인후, 김성원, 정철, 백광훈과 같은 문사들의 작품들을 통해 환벽당의 가치와 역사성, 유래 등을 다각도로 살펴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건립 이후로 김윤제의 별서로서의 기능 외에도 인근의 식영정, 소쇄원과 함께 ‘일동삼승(一洞三勝)’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곳”이라며 “당대 많은 문인들이 출입해 시문을 창작한 문학적 공간 외에도 당대 건축과 문화적 특징이 오롯이 담긴 의미있는 문화자산”이라고 덧붙였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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