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의 제왕’이라는 말이다. 말 그대로 관이 없는 제왕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왕관이 없는데 어떻게 제왕일까. 다분히 역설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눈에 보이는 왕관은 없지만 제왕의 권위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뜻일 게다.
세상에는 다양한 무관의 제왕들이 있다. 빛나는 타이틀은 없지만 실력을 갖춘 인재들이 있다는 의미다. 특히 스포츠 분야에서 독보적인 실력을 갖췄지만 우승을 하지 못한 이들을 일컬어 무관의 챔피언이라고 한다. 흔히 재야의 고수라는 말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들은 공식적인 ‘메달’이나 ‘상’은 없지만 누구나 인정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다.
우리 문화재 가운데도 무관의 제왕들이 많다. ‘통일신라 철조여래좌상’을 비롯해 ‘분청사기 철화 연꽃물고기무늬 병’, ‘김명국 달마도’, ‘강희안 고사관수도’, ‘이경윤 고사탁족도’, ‘석조약사여래좌상’, ‘고려정병’ 등은 우리 문화재에서도 손꼽히는 무관의 제왕들이다.
위에 열거한 문화재들은 당대를 대표하는 뛰어난 유물이지만 국보나 보물로 지정돼 있지 않다. 한마디로 무관의 국보, 무관의 걸작품인 것이다.
물론 문화재를 국보나 보물로 지정하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정성적인 평가에 기인한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큰 것, 제작 연대가 오래되고 시대를 대표하며 제작기법이 우수해 그 유례가 적은 것 등’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문화재위원들이 입김이 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숨은 명작 문화재를 소개한 책이 출간돼 눈길을 끈다. 국보나 보물로 지정돼 있지 않은 걸작 문화재 35점을 조명한 ‘무관의 국보’는 비지정 국보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는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배한철 경영학 박사다.
저자는 문화재와 한국사에 빠져 전국 박물관과 유적지를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지금까지 ‘얼굴, 사람과 역사를 기록하다’, ‘역사, 선비의 서재에 들다’,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등 베스트셀러를 펴냈다.
“문화재는 우리 조상이 살았던 자취이자 역사의 징표이다. 그 시대의 흔적과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게 문화재인 것이다. 필자는 문화재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치는 것을 느낀다.”
‘분청사기 철화 연꽃물고기무늬 병’은 익살과 파격 등 서민의 생활감정이 잘 표현된 유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 국보나 보물로 지정돼 있지 않다. ‘분청사기 인화무늬 항아리’도 마찬가지다. 꽃무늬가 반복적으로 새겨진 수작이지만 국가문화재가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분청사기는 국보가 6점, 보물은 27점에 불과하며 여전히 많은 명품 분청사기들이 국가문화재로 분류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단원 김홍도는 도교의 신선이라는 주제를 자신만의 화풍으로 형상화한 화가다. 스승 강세황이 쓴 ‘단원기’에는 “아름다운 풍채에 도량이 크고 넓어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신선과 같다고 하였다”고 쓰고 있다. 그만큼 단원의 신선도는 세속을 초월하는 고상함을 담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삼성미술관 리움과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신선도 외에는 국보나 보물이 아니라고 부연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김명국의 달마도’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달마도’라는 평가를 받는다. 김명국은 “중국의 절파를 기본으로 하면서 일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선종화풍을 수용해 독자적인 회화양식을 구축”한 것이 정평이 나 있다. 그의 달마도는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그린 것이다. 다행히 국립중앙박물관이 구입해 소장을 하고 있지만 국보나 보물은 아니다.
이밖에 책에는 정조의 왕권 강화 야심을 엿볼 수 있는 ‘화성능행도’를 비롯해 17세기 조선 실상을 보여주는 최초의 한글요리서 ‘음식디미방’, 독일이 반환한 ‘왜관수도원 겸재화첩’ 등도 만날 수 있다. <매일경제신문사·2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