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전
10월 23일까지 광주시립미술관
‘자화상’‘여성인물상’ 등 170여점
드로잉북 등 아카이브 자료 전시
유족 인터뷰 동영상 상영
“내가 혼을 부어서 만든 흙의 아들은 영원히 살 수가 있다.”
고(故) 권진규 조각가(1922~1973)는 생전 막내 동생 권경숙 여사에게 자신만만하게 말한곤 했다.
흙으로 만든 그의 ‘아들들’은 세월을 건너 지금, 우리 곁에 있다. 평생 잊지 못한 ‘사랑하는 여인의 얼굴’로, 원시동굴에게 만날 듯한 동물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모습으로, 가사를 걸친 자신의 모습으로.
낮게 조명이 깔린 전시장에서 만나는 작품 한 점 한 점은 오래 발길을 붙잡는다. 돌이나 브론즈보다 더 오랜 생명력을 갖는 테라코타에 몰두했던 그는 “작가로서(테라코타 작업이) 재미있다면 불장난에서 오는 우연성을 작품에서 기대할 수 있고, 브론즈같이 결정적인 순간에 딴사람(끝손질하는 기술자)에게 가는 게 없다는 점”이라고 말했고, 전시에서는 바로 그 테라코타 작품과 생의 후반기에 몰두했던 건칠 작품의 진수를 ‘오롯이’ 만날 수 있다.
광주시립미술관(관장 전승보)에서 열리고 있는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전-영원을 빚은, 권진규’전(10월23일까지)은 한국근현대 조각의 선구자 권진규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전시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천재’ 이미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구도자처럼 작품에 매진했던 그의 예술혼을 대면하는 자리이기도하다. 유족이 서울시립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한 것을 계기로 열린 이번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과 광주시립미술관이 공동 주최했다.
화제를 모았던 서울전에 이어 마련된 이번 전시는 작가가 생애 전반에 걸쳐 제작한 조각 작품 120여점과 아카이브, 드로잉 50여점 등을 만나는 대규모 기획전으로 기증작품 뿐 아니라 국립현대술관, 가나문화재단, 개인소장자 작품을 아우른다.
전시는 종이에 잉크로 그린 드로잉 ‘자화상’(1956~57)으로 시작한다. 함흥 출신인 그는 1947년 이쾌대가 운영하는 성북미술연구소에 다니면서 미술가의 길로 들어선다. 이후 1949년 29세 되던해 일본 무사시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해 앙투완 브루델을 사사했던 시미즈 다카시의 가르침을 받고 일본 이과전(1950년) 최고상을 수상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부친의 타계로 한국에 돌아온 그는 작업에 매진하지만, 미술계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상황속에서 ‘이상’과 ‘영원’을 추구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권진규의 대표작은 ‘여성 인물상’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작품들이다. 집에서 일하던 ‘영희’, 전시회에서 그의 작품을 보고 감명을 받아 제자가 된 서양화가 ‘이선자’, ‘정제’ 등 자신이 ‘잘 아는’ 이들을 모델로 삼아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겉모습이 아닌 모델의 근본에 침잠해 들어가며 ‘본질’을 표현하려 애썼고, 그 느낌은 작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여성들의 모습은 각기 다른 ‘인생’을 품고 있으며 그 중 스카프로 머리를 감싼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는 ‘지원의 얼굴’(1967)은 대표작으로 꼽힌다.
또 같은 대학 학생으로 첫사랑이자 아내였던 일본인 오기노 도모가 모델인 ‘도모’(1951)는 권진규의 현존 작품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애틋함이 묻어난다.
동물상(象) 역시 그가 즐겨 작업한 소재다. 초창기의 ‘마두’ 시리즈부터 고양이, 개, 소, 뱀 등 다양한 동물을 아우른다. 서울전에서 화제를 모았던 BTS 리더 RM의 소장품 ‘말’은 이번 전시에서는 빠졌지만 독특한 조형미를 선보이는 ‘서 있는 말’, 권작가가 존경했던 이중섭의 ‘황소, 1954’에서 영감을 받은 ‘흰소, 1972’, 허리를 곧추세운 고양이 등 날렵한 움직임과 동작이 눈에 띄는 작품들은 인상적이다.
그가 아틀리에에 늘상 놓아두고 아주 마음에 들어했던 작품 ‘손’은 구부러진 엄지 손가락과 하늘을 향해 펼친 손바닥이 독특한 느낌을 준다.
2층 전시실에서는 교회 의뢰로 제작했지만 너무 어둡다는 이유로 예배당에는 걸리지 못한 ‘십자가 위 그리스도’가 옅은 빛을 받으며 벽면에 걸려 있다. 일그러진 표정과 거친 피부에서 고뇌에 찬 예수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테라코타, 은행나무, 석고 등으로 만든 ‘자소상(自塑像)’은 그의 인생의 면면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듯하다. 특히 자신을 승려로 형상화한 ‘가사를 걸친 자소상’은 보일듯 말듯한 미소가 인상적이다.
1·2층 통로에서는 그가 직접 설계한 권진규 아뜰리에(국가등록문화재 제134) 사진을 만날 수 있다. ‘절간의 마당처럼 깔끔했던’ 소박한 작업실은 유족들이 내셔녈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 기증했다.
방대한 드로잉도 눈길을 끈다. “드로잉을 그림으로써 조각의 진상을 알 수 있으며 그곳에서 조각이 나온다”고 말했던 그는 모두 29권의 드로잉북을 남겼고 한시, 일본시, 러시아 소설, 음악이론서 등 다양한 책을 섭렵했다.
전시장을 방문하면 두 편의 영상을 꼭 관람하길 권한다. 오랜 시간 함께 살며 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던 권경숙 여사의 육성을 통해 지금은 없는 권 작가의 작품 세계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권 여사는 누구보다 한국의 토기를 사랑하고, 어디에도 내어놓지 못한 마음을 드로잉북에 시와 글로 남기고, 조카들에게 흙을 밟는 즐거움을 주고, 아내 도모와 10년만에 재회하지만 ‘바보’라고 말하며 울며 떠난 그녀를 잡지 못한 오빠의 이야기를 천천히 들려준다.
또 한편은 줄곧 외삼촌과 살며 아뜰리에를 드나들었던 권여사의 아들 허명회 고려대 명예교수의 영상으로 그는 외삼촌의 작업과 인생을 ‘몰입’이라는 단어로 정의했다.
인터뷰를 보고난 후 ‘다시’ 작품 앞에 서면 ‘또 다른’ 이야기가 들려온다. 오전 10시~오후 6시. 무료 관람. 월요일 휴관.
/글·사진=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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