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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호기자

발포명령자·암매장 등 40년 감춰진 5·18의 진실 꼭 밝혀내야…

by 광주일보 2020.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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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야 할 5·18 미완의 과제]

 

우리는 보았다. 1980년 5월 지옥 같았던 ‘광주’의 참상을.

우리는 하나로 맞섰다. 진압봉과 총칼을 앞세운 무차별적인 계엄군의 폭력에 바다처럼 출렁이며 서로 나눠 먹고, 함께 울며, 앞으로 나아가면서. 광주는 역사다. 한국 민주주의라는 나무가 이만큼이라도 드높이, 푸르게 자라게 한.

하지만, 해마다 5월이 오면 광주의 심장은 타는 듯한 고통에 시달린다. 40년이 지났는데, 이제 무덤덤해질 만도 하건만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를 옥죄어 온다. 여전히 5·18에 대한 왜곡·폄훼는 끊이지 않고 있다. 불혹의 세월 속에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투쟁을 거쳐 5·18의 진실은 정권의 교체를 통해 인정 받았다. 주요 법적·행정적 제도를 통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됐지만 아직도 풀지 못한 미해결 과제들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동안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규명과 관련해 정부차원의 4차례 조사(1988년 국회청문회, 1995년 검찰조사, 2007년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2018년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가 이뤄졌지만, 아직도 밝혀내지 못한 진실들이 남아있는 것이다.

광주일보는 40주년을 맞는 올해, 반드시 풀어야 할 5·18 미완의 숙제를 정리해본다.

 

1980년 5월 21일 낮 12시께 광주시 동구 금남로에서 버스를 앞세우고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군이 도청앞에 저지선을 만든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다. 한 시간 뒤 계엄군의 집단발포가 있었다. <광주일보 자료사진>

◇ 최초발포와 집단발포 책임자 및 경위

1980년 오월 계엄군의 총부리에서 불이 뿜어져 나와 무고한 광주시민들이 쓰러졌다. 하지만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엄군내에서 시민들을 향한 사격을 명령한 이는 밝혀지지 않았다. 광주 상공에서 시민들을 향해 쐈던 헬기사격의 진실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전두환의 재판이 진행중이다.

최초 발포와 집단발포 책임자 규명은 5·18 민주화운동의 핵심 과제임에도 40년째 물증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980년 5월 19일 오후 5시께 광주고 부근에서 11공수 63대대 장교가 쏜 최초 발포, 20일 광주역 집단 발포, 21일 도청 앞 집단 발포의 명령권자와 지휘체계가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먼저 1980년 당시 최규한 전 대통령의 개인기록을 찾고,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을 조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5·18 당시 핵심인물들의 행적 및 발포명령 개입 여부를 밝혀야 한다. 특히 전두환 광주 방문설을 비롯해 당시 신군부의 핵심인물자들의 명단과 행적을 추적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당시 특전사령관인 정호영이 광주를 방문해 지휘했는지 여부 등을 조사해 계엄군의 지휘체계도 확인해야 할 사항이다.

계엄군의 발포는 자위권의 일환이라는 가해자들의 주장을 깨트릴 수 있는 증거를 찾아야 한다. 또 당시 계엄군으로 활동한 병사와 간부들의 명단을 확보, 부대 동선을 따라 계엄군들의 모든 진압작전을 재구성하면서 실제 일어난 발포사건 등을 확인하고 발포 실행자를 특정해야 한다.

여러 정보기관(보안사, 중앙정보부, 계엄사 치안처, 경찰, 검찰 등) 보고경로와 내용을 확인, 시민군을 가장한 계엄군으로 알려진 ‘편의대’의 실체를 규명하고 지시·첩보보고 체계도 밝혀야 한다.

 

국립 5·18민주묘지 내 유영보관소를 찾은 한 가족이 영정사진을 보며 고인들을 추모하고 있다.

사망사건

5·18민주화운동 기간인 1980년 5월 18일~27일까지 민간인 사망자는 현재까지 165명으로 집계되고있다. 5·18 당시 광주·전남 일대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및 사망사건 중 현재까지 사망자의 신원이 확인된 153명, 행방불명자 인정자 중 신원이 확인된 6명, 무연고 신원미상 사망 5명, 실제로는 5·18기간에 사망했으나 상이후사망자로 보상인정을 받은 1명 등이다.

하지만 당시 다수의 실종자가 발생해 165명이 이 기간 발생한 정확한 사망자 수인지는 불확실한 상태이다. 5·18연구자들에 따라 사망자 숫자는 차이가 있다. 또 사망자 165명 중 일부는 그 정확한 사망 일자·장소·경위 등이 확실치 않아 오랫동안 논란이 계속돼, 오히려 유가족들이 고통을 받아오고 있는 실정이다. 5·18민주화운동에 사망사건에 대한 전면 재조사가 필요한 이유이다.

5·18민주화운동 기간 사망자 중 신원이 확인된 153건의 사망자 관련 기록의 존재 여부와 소재, 생산 이력을 추적해 사망자 기록의 변천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5·18사망자 검시기록에 대한 검토 및 원본 대조를 통해 사망자별 시신 수습과정, 사망 일자· 장소·경위 등에 대한 확인도 필요하다. 법의학 전문가, 군사전문가 등의 자문을 통해 정확한 사인과 사망원인 등도 판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5·18기간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망사건을 밝히는 데는 당시 계엄군으로 활동한 부대인 제 3·7·11공수특전여단, 20사단, 31사단, 전투병과교육사령부 예하 부대 등 편제·병력·부대원을 파악하고 세부 작전 및 기타 활동 내역의 기록물 등도 조사하는 것이 중요하다.

 

5·18 광주항쟁 당시 전남도청 광장에 집결된 희생자 시신이 태극기에 덮여 있다. 가족들이 시신 확인을 하려고 관을 들춰보고 있다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

5·18기간 중에 자행된 반인도적인 범죄행위인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은 최소 6건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80년 5월 20일 밤 11시 30분께 광주역 앞에서 계엄군인 3공수여단은 시위대에 의해 수세에 몰리자 시위대열과 무관한 주택가를 향해 M60기관총을 쏴 4명 이상의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

5월 20일부터 21일 사이에도 광주시내에서 체포한 시민들을 대검으로 살상하는 등의 가혹행위가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심한 부상을 입은 시민들을 광주교도소로 이송해 방치 후 사망에 이르자 암매장을 했다. 또 전남대에서 사망한 2명의 고등학생은 이학부 건물 뒷산에 가매장되기도 했다.

또한 20사단 병력이 22일 광주국군통합병원을 확보하는 작전을 벌인다는 명목으로 화정동·내방동 주택가에 무차별 사격을 가해 최소 8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주남마을은 대표적인 민간인 집단학살이 이뤄진 장소이다. 22일과 23일 사이 총격에 의한 많은 민간인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증언이 있으나 현장에서 사망한 공식적인 희생자 숫자마저 확인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23일에는 해남군 우슬재와 복평리에서 매복하고 있던 31사단의 총격에 의해 박영철·김귀환씨 등이 사망했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보다 더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있다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24일 계엄군간의 오인교전이 벌어졌고, 이후 11공수여단이 이 일대 주택가를 수색하면서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그러나 1988년 국회청문회, 1995년 검찰조사 등에서 당시 현장 지휘관과 당시 최웅 11공수여단장 등은 민간인집단학살은 5·18민주화운동 기간에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며 전면 부정했다.

40년 동안 5·18기간중에 광주와 전남지역에서 계엄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집단학살에 대한 피해자 가족과 시민들의 증언, 언론보도 등이 넘쳐나지만 명확한 진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특히 민간인집단학살에 대한 진상이 밝혀지면, 계엄군의 발포가 자위적 수단이라는 주장과 5·18은 북한군이 투입해서 일어났다는 주장 등의 왜곡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집단학살에 대한 진실은 곧 행방불명과 암매장지의대한 진실과도 연결고리를 갖고있다.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내 행방불명자 묘역 너머로 2020년의 새로운 해가 따스한 기운을 뿜어내며 떠오르고 있다. /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행방불명자의 규모 및 소재

40년간 풀리지 않은 5·18 핵심 의혹이 바로 ‘행불자와 암매장지’ 문제다. 암매장을 비롯한 사체의 유기 여부를 규명하고, 그에 따라 행방불명자의 규모와 소재를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5·18민주화운동과 관련, 행방불명자로 광주시에 보상신청을 접수한 건수는 모두 448건으로 중복 건수를 제외하면 모두 242건이다. 이 중에서 인정된 행방불명자는 84명에 그친다. 84명의 행방불명자 중에서 유전자 검사와 가족들의 유전자를 대조해 신원이 확인된 경우가 6명, 유전자 검사결과 확인 후에도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경우가 5명으로 결국 가족 곁으로 돌아가지 못한 행방불명자는 78명에 달한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의 가장 중요한 과제임에도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 등의 조사대상에 포함되지 못했고, 단 한차례의 공식 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광주시와 5·18기념재단 등의 민간단체에서 ‘5·18행방불명자 소재 찾기’ 사업을 추진하면서 수차례 암매장지 발굴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발굴은 무명열사묘에서 찾은 6명(권호영, 양희영, 채수길 등)에 불과했다.

그동안 행불자로 인정받지 못한 유가족들의 대부분은 서류준비(인우보증인 확보 등)가 미흡했기 때문이었다. 첫 보상접수가 5·18이 10년이나 지난 뒤, 199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이후 행불자 접수가 이뤄졌기 때문에 유가족들만의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또 당시 피해사실 자체가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숨어 살았던 유가족들도 있었다.

불인정자들에 대한 전수조사를 실시, 단 한 명의 행불자라도 소재를 확인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민간인 사망과 관련된 군기록과 공식 확인된 사망자를 교차 확인하는 작업, 5·18민주화운동 당시 현장에서 촬영된 사진·영상물 등에 등장하는 사망자 명단, 시신 영상자료를 분석해 공식 인정된 사망자와 대조하는 작업 등도 진행돼야 한다. 또 지난해 김용장씨 등이 증언했던 ‘광주 국군통합병원 소각장 시신 소각설’과 언론 등에 제기된 ‘사체 해양투기설’ 등의 진실도 밝혀야 할 과제이다.

계엄군에 의한 성폭력 사건

5·18 당시 계엄군의 성폭력은 지난 2018년 피해 당사자들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지고, 계엄군의 성폭력을 정부차원에서 처음으로 인정했다.

2018년 6월~10월까지 국가인권위·여성가족부·국방부는 ‘5·18 계엄군 등 성폭력 공동조사단’을 꾸려 공동조사를 진행, 성추행·성고문 등 17건의 성폭력 피해와 45건의 여성인권침해 사례를 확인했다.

하지만, 40년의 세월 동안 은폐됐던 여성들에 대한 성폭행이 5개월 간의 조사로 모두 밝혀지기에는 부족했다. 실제로 조사단에 접수한 피해자 중 광주시에 피해보상을 신청하지 않은 피해자들이 많았으며, 문헌 자료 등에 따르면 한번에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한 사건들도 있었기 때문에 추가 피해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또 공동조사단 기간중 이뤄진 피해신고 12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사건 가해자 ·가해부대를 특정했으나 조사가 미진한 부분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5월 19일 유동삼거리에서 납치돼 인근 백운동 야산에서 성폭행당한 사건에는 7·11공수여단 부대 관계자가 연루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5월 20일 천수당 약국 골목에서 발생한 사건과 같은 날 전남여고 후문 인근에서 발생한 사건, 같은 날 가톨릭센터 인근에서 발생한 사건도 같은 부대 관계자로 보인다.

5월 23일께 망월동 검문소 및 광주교도소 인근에서 발생한 사건에서 3공수여단 병력이 지목되기도 했다.

또 2018년 조사단의 조사는 성폭행·성적 가혹행위 등 성적 문제와 관련된 인권침해 행위에 국한됐고, 구타·욕설 등 일반적 폭력행위는 조사범위상 검토범위에서 제외됐다. 이에 조사 범위를 여성에 대한 일반적 폭력행위까지 포함한다면 여성에 대한 성폭력·인권침해 행위는 훨씬 광범위한 수준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

 

1980년 5월 24일 시민군이 전남도청 앞에서 전경들의 방석모를 쓰고 차량에 탑승한 채 출동을 대기하고 있다. 보수 인사 지만원씨는 사진의 왼쪽인물을 특수 임무를 띤 북한군으로 지목, ‘제1광수’(광주 북한특수군)라는 명칭을 붙여 5·18왜곡 보도에 활용하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탈북자의 북한 특수군 광주침투 주장

40년동안 5·18민주화운동은 왜곡·폄훼에 시달렸다. 그 왜곡과 폄훼의 중심에는 ‘북한군 투입설’이 있다. 40주년을 맞는 올해에도 왜곡·비방 사례가 SNS와 유튜브를 통해 확산되고 있다. 지만원씨 등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확산하고 있는 북한군 개입 여부 및 북한군 침투조작설의 진실이 밝혀 더 이상의 논란을 종식시켜야 할 것이다.

먼저 5·18 당시 북한군 특수군으로 땅굴 등을 통해 직접 남파했다고 주장한 탈북자 임천용씨, 광주에 남파된 북한특수군의 체험담을 저술한 탈북자 이주성씨, 북한 청진시에 5·18 남파 북한군묘역이 있다고 주장하는 탈북자 김주호씨 등에 대한 대인조사 및 이들의 주장을 보도한 종편과 각종 영상관계자 들을 조사해야 할 것이다.

이들 외에도 1980년 당시 광주에 북한군 침투설을 주장하는 탈북자들과 이들과 같은 주장을 펼치는 각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청문회를 열어 진실을 밝혀야 한다. 동시에 1980년 당시 북한군 관련 정보 및 한반도 안보상황, 한미연합사와 정보기관 등의 관련 기록에 대한 면밀한 조사도 병행돼야 한다. 또한 5·18 당시 남파 간첩 수사기록 등 관련 대공기록 조사와 5·18현장에 있었던 계엄군, 보안사 등 군·경찰 관계자 등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병행해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

◇ 광주·전남일대 교도소·무기고 피습사건

5·18 왜곡 세력들은 무기고, 교도소, 아시아자동차에 대한 습격은 북한군의 소행임을 보여주는 단적이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일련의 사건이 북한에서 계획하고 북한에서 투입된 이들에 의한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만큼 면밀한 조사가 시급하다.

더불어 당시 보안사에서 기록한 ‘전남도경 상황일지’에 기록된 피탈 시점과 지점 등이 경찰 자체자료와 비교해 보면 큰 차이가 있어 ‘보안사 511대책반’의 자료 변조 및 날조 의혹 가능성이 높은 점도 살펴봐야 할 대목이다. 또 집단발포 시기는 가해자들이 ‘시민군의 선제 무장과 공격에 따른 자위권 행사’라는 주장이 억지이며, ‘계엄군의 집단발포 이후 시민군의 무장’이 뒤따랐다는 시민군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이에 각 피습사건에 대한 발생 경위, 사건과정, 각 피습 시간 및 장소, 탈취된 무기 종류 및 수량, 군경 관련자, 시위대 가담자, 목격자 및 피해자 등에 대한 면밀한 조사가 이뤄져 진실을 밝혀야 한다.

당시 시민군으로 활동하면서 무기고 탈취에 직접 가담한 사람들을 조사해 당시 수사기록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또 당시 각 지서·파출소 및 무기고 근무자, 시민군의 무기 자진반납 관련 전남도경 관계자와 정보과·대공과 직원 등 사건 피해자 및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진실에 다가가야 할 것이다.

/정병호 기자 jusbh@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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