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의 기로에 선 나라와 생사를 같이 하자”
을사조약 후 전북 태인 무성서원서 함께 의병 일으켜
순창전투서 일본군과 격전하다가 붙잡혀 서울로 압송
최익현, 옥사에서 순국…임병찬, 거문도 유배 중 숨져
“영특하고 호기롭게 뛰어났건만, 하늘을 만나지 못해 어쩌다 오늘날 이 먼 바다 건너왔는가. 다행히 선생 모셔 이 길을 함께 하니, 천년에 꽃다운 이름 청사에 빛나리.”
을사조약 후 전북 태인에서 면암 최익현과 함께 거병해 싸우다 대마도까지 붙잡혀 간 임병찬에 대해 동지 고석진이 지은 시다. 병찬은 1851년(철종 2년) 2월 5일 전북 옥구군 사면 상평리 남산 아래서 아버지 임용래와 어머니 왕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임용래는 42세에 얻은 병찬을 애지중지해 세살부터 인근 서당에 보내 글을 익히게 했는데, 곧 천자문을 외우고 11세에 논어를, 13세에 시경을 배웠다. 15세에 임천 조씨 집안 규수와 혼인했으나 곧 사망하자 여산 송씨와 재혼, 6년만인 21세에 맏아들 응철을 얻었다. 17세 때부터 옥구 형방에 나가 일하며, 예방과 공방을 거쳐 옥구 호장을 지내는 등 지방 관아에서 일했다. 30세에 둘째 아들 능철을 낳고 32세에 옥구에서 태인군 산내면 영동으로 이사했다. 38세에 무과전시에 급제했고, 그해 호남지방에 큰 흉년이 들자 돈 3,000냥과 벼 70석을 헌납했다. 그 공로가 인정되고 관민의 신임도 깊어 39세에 낙안(현재의 순천시 낙안면)군수에 제수됐다.
44세에 임실군수에 제수됐지만 사양하고,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정읍군 산내면 종성리 주민들과 뒷산에 올라 망곡례를 올렸다. 1905년 11월 18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73세의 면암 최익현이 12월 3일 상경해 대궐 문밖에서 을사오적 숙청과 을사조약 거부 투쟁 전개를 강조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때 고석진의 소개로 55세의 병찬은 최익현과 만났다. 병찬은 이 때 거병을 준비하면서 43년 전 별세한 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르겠다며 태인 종석산에 6칸짜리 시묘막을 설치했다. 종석산은 정상이 평평하고, 동굴도 있어 훈련을 하고 무기를 숨겨둘 수 있다고 판단해 준비에 들어간 것이다.
최익현이 1906년 2월 편지로 운봉으로 나가 영남과 호남의 형세를 장악하자는 것에 대한 생각을 묻자 병찬은 “먼저 전주에서 기세를 올리고 운봉에 심복을 둔 다음 두류산에 웅거해 진퇴공수의 계획을 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답했다.
이후 송사 기우만, 금포 이항선, 장제세, 조안국 등과 연락해 연계할 방책을 강구하면서 곽한일 등과 거병에 대해 구체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최익현은 제자 이재윤을 시켜 청나라에 구원 요청을 강구할 것을, 오재열에게는 군사와 무기를 모아 운봉에 대기할 것을 각각 지시했다. 병찬은 손수 윤통문을 써 1906년 2월 15일 장제세, 한안국, 배응천 등의 이름으로 각 지역의 향장, 수서기 및 백성들에게 보냈다. 여기에는 결의와 군율, 복장, 규칙 등을 상세히 적었는데, 규율 4가지는 군령을 따를 것, 비밀을 누설하지 말 것, 진중에서 물러서지 말 것 등이었다. 또 “구국의 길에 귀천이 없다”고 명시한 뒤 “광대나 백정이라도 지혜와 용맹이 있으면 상좌로 맞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익현은 최제학과 호남으로 향해 2월 30일 태인 종석산 아래에서 임병찬과 대면해 일주일간 군사 훈련을 지켜본 뒤 3월 8일 전북 진안으로 떠나면서 병찬에게 의거를 당부했다.
3월 초순 충북 제천에서 의암 유인석의 제자 이정규, 의당 김태원, 영남의 선비 조재학, 이양호 등이 거사 준비에 나서는 등 호남과 영남에서 이에 호응하며 기세가 번져나가자 일본 관헌의 감시와 탄압은 더욱 극심해졌다. 4월 1일 최익현, 최제학, 정시해, 곽한일, 남규진 등은 종석산의 병찬을 찾아와 거병을 촉구했으나, 병찬은 훈련 부족을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나 최익현이 성패와 이해를 따질 시간이 없다며 설득하자 이를 수용하면서 “백발을 휘날리며 밭이랑서 일어남은 초야의 충성심을 바치려함이로다. 왜적을 치는 것은 사람마다 해야 할 일, 고금이 다를소냐 물어 무엇하리오.”라는 시를 읊었다.
최익현은 남규진과 곽한일을 홍주 민종식에게 보내 서울로 올라가 을사조약을 파기하고 동양 평화에 공헌할 것을 당부하고, 고석진에게는 군자금과 군수품 목록을 병찬에게 인계하도록 했다. 이어 전주, 순창, 담양, 창평, 광주 등에 연락하고, 임실군수 엄덕조, 순창 삼방포수 채영찬 등에게 밀통해 4월 13일 무성(정읍의 옛 지명)서원에서 만날 것을 약속했다. 최익현은 4월 8일 담양 용추사에서 송사 기우만과 만나 50여 명 선비들에게 격문을 나눠주고, 4월 10일 113명이 동맹록을 작성하며 결의를 다졌다.
4월 13일 최익현은 의병들 앞에서 “멸망의 기로에 선 나라와 생사를 같이 하자”며 설득한 뒤, “전쟁을 하러가는 것은 곧 죽으러 가는 것”이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이후 80여 명이 대오를 갖춰 태인으로 향하자 태인군수 손병호는 도망치고, 의병들은 태인향교로 들어가 명륜당에서 회의를 하고 소총 35정과 탄환을 얻었다. 이 때 흥덕에 사는 선비 고용진(고석진의 형)이 강종회 등 포수 30여 명을 데리고 참여했다. 곳곳에 격문을 보내며 태인에서 하루 30리씩 행군해 정읍에 도착하자 의병 100여 명이 새로 합류하고 화약 100근, 소총 20정, 세금 30원 등을 압수했다. 다시 30리를 이동해 내장사로 가 진을 구축한 뒤 4월 15일 오전 점오를 하자 의병의 수는 300여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병찬은 이를 좌우익으로 나눠 훈련시킨 뒤 다시 행군을 시작, 순창 귀암사에 도착하자마자 왜적의 추적 소식을 들었다.
최익현은 전투를 주장했으나 병찬이 설득해 순창으로 이동했으며, 이 때 순창군수 이건용 등이 반기며 소총 25정, 화약 10근, 세금 40원도 거둬 전달했다. 채영찬, 황균창, 김갑술, 양윤숙 등 포수 수 십명이 합류하는 등 의병 규모는 어느새 500여 명으로 불어났다. 병찬은 강종회를 화포장에, 채영찬·김갑술을 수포수로 임명했다. 4월 16일 오후 2시 전주경무고문지부의 일본 경찰 10여 명이 다가와 순창성 밖에서 교전했으나 의병의 규모를 보고 달아났다. 다음날인 17일 곡성으로 진군해 소총 5정, 화약 13근, 30원 등을 접수하고, 18일 남원으로 향하다 왜적의 방비가 삼엄하다는 정보에 순창으로 회군했다.
천민이었던 포수들이 의병의 주력부대가 됐으며, 이는 영국 데일리메일 기자이자 저술가 맥킨지(F.A. Makenzie)가 쓴 한국의 비극(Tragedy of Korea)에도 잘 묘사돼 있다. 그는 “그들의 무기는 총신이 길고 7~8인치의 놋쇠 방아쇠가 달린 구식 격발총으로, 탄약을 재는데 시간이 소요되지만 한 번에 한 발로 호랑이를 단 번에 쏴 죽이는 훈련이 돼 있는 가장 용맹스러운 사냥꾼”이라고 했다.
김송현, 엄덕조 등도 포수 수십 명을 데리고 합류하면서 의병은 6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일본군 10여 명이 순창군수 이건용을 만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병찬은 한 부대 이끌고 추격해 일본군의 무기와 문서를 노획했다. 이 문서에는 전주관찰사 한진창이 순창군수 이건용에게 일본군을 인도해 의병을 공격하자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병찬이 문서를 내밀며 이건용을 호통쳤으며, 최익현이 참형하려하자 병찬이 설득해 살려낸 뒤 선봉장을 맡겼다. 1906년 4월 20일 광주관찰사 이도재가 보낸 칙사가 고종의 의병해산조칙을 들고 순창에 도착하자 최익현은 거짓 어명이라며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장성을 향해 출발할 채비를 하는 의병을 전주와 남원진위대 소속 수백 여명의 병사들이 포위해버렸다. 최익현과 임병찬은 전투 중지를 명령하고 문달환과 임현주에게 편지를 보내 같은 동포인 진위대와 싸울 수 없으니 철수할 것을 당부했으나 진위대는 물러설 수 없다며 압박해왔다. 여러 장수들은 싸울 것을 주장했으나 최익현이 동족끼리 싸울 수 없다며 해산을 명령했다. 병찬은 마지막까지 싸울 것을 주장해 22명이 자신의 이름을 쓴 자리에 남았으며, 33세의 정시해가 총탄에 맞아 숨졌다.
전주진위대 김중희, 남원진위대 김희근 등이 의병을 향해 집중 사격에 나섰으나 남아 있는 의병들은 대항을 포기했다. 4월 21일 숨진 정시해를 입관한 뒤 최익현이 시로 그 넋을 위로했으며, 남아있던 12명의 선비는 진위대에 의해 3일간 연금됐다. 4월 23일 오전 전주진위대 소대장 김희진이 이들을 서울로 압송하라는 고종의 칙지를 보이며, 최익현·임병찬과 함께 고석진, 김기술, 문달환, 임현주, 조우식, 조영선, 최제학, 나기덕, 이용길, 유해용, 양재해 등을 포승줄로 묶었다. 이때 병찬의 동생 임병대, 고제만, 조영가 등이 술과 안주를 들고와 작별 인사를 했으나 제지당했다.
끌려가는 최익현 등을 보고 안의의 선비 이완발이 통곡하고, 진안에 살던 장진욱은 전주진위대를 찾아와 행렬의 뒤를 따랐다. 4월 27일 대전에서 기차를 타고 해질 무렵 숭례문 앞에 도착하자 일본헌병대장이 이끄는 일본헌병이 13명을 겹겹이 포위했다. 일본 헌병사령부에 끌려간 뒤 최익현은 3일간 음식을 거부하고, 임병찬 등은 손가락을 묶어 공중에 매달아 때리는 등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계속되는 일본 헌병의 심문에 임병찬은 “이완용과 친하다”, “최익현은 아무 것도 모르며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진술하는 등 당당하게 임했다.
구금된 지 28일 만인 5월 28일 오후 4시 일본 헌병사령부가 최익현에게 대마도 감금 3년, 임병찬 감금 2년, 고석진 ·최제학 감금 4개월, 나머지 9명에게는 매 100대 후 석방 등을 선고했다. 최익현과 병찬은 기차로 부산 초량역에 도착한 뒤 배에 올라 대마도 이즈하라항에 도착했다. 앞서 붙잡혀온 정산의 이식, 예산 남경천, 보령 유준근, 홍주 안항식, 부여 이상두, 남포 최중일, 홍주 신보균, 비인의 문석환 등 호서지방 9명 의병장은 최익현·임병찬과 서로 반가워하며 마음을 달랬다. 최익현은 그러나 머리카락을 깎으면 밥을 주겠다는 일본군의 말에 단식을 시작해 10일째 되던 날 병찬에게 마지막 상소를 받아쓰도록 했다. 병찬 역시 종기로 고생했으며, 두 달 만인 9월 4일 임응철, 최영조, 오봉수 등이 대마도에 왔으나 면회하지 못하고 4일 만에 되돌아갔다.
최익현은 일본군의 사과와 설득에 다시 식사를 시작했으나 10월 19일 병세가 심해지면서 아들 최영조가 약까지 가져왔으나 차도가 없었다. 그러다가 11월 17일 병찬의 무릎 위에서 숨졌다. 1906년 11월 21일(양력으로 1907년 1월 5일) 부산 초량부두에 시신이 도착하자 통곡하는 인파들이 몰려들었으며, 그들은 ‘춘추대의(春秋大義) 일월고충(日月孤忠)’이라고 크게 쓴 비단을 들고 그를 맞았다.
최익현이 사망한 두 달 후 순종 가례 축하 특별사면령으로 임병찬은 풀려났으며, 1907년 1월 19일 부산에 도착해 3월 7일 최익현이 남긴 상소를 들고 조정에 전했다.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군대 강대 해산 등으로 항일의 기세가 높아지자 1907년 12월 이평해, 광주 김준(태원), 순창 김봉권·양인영·채영찬, 김제 조공삼 등이 병찬에게 함께 거병할 것을 설득했으나 불참했다. 이들과의 연관성을 묻는 태인분견소의 일본경찰에게 끌려가 3개월만에 석방된 뒤 두문불출했으며, 이후 병찬의 사촌동생 임병기도 찾아와 거병을 요청했으나 거절했다.
그 뒤 1912년 9월 28일 공주 선비 이칙이 고종의 밀조를 받아 임병찬을 종2품 가선대부 독립의군부 전라남도 순무대장으로 임명했으며, 1913년 1월 10일 참판을 지낸 이인순이 고종의 밀어를 가지고 와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에 임명했다. 이에 따라 이명상, 김재순, 곽한일, 전용규 등과 거사를 논의했으며, 대표는 모두 13명으로 임병찬, 민정식, 이명상, 이인순, 조형하, 곽한일, 채상덕, 김용응, 전용규, 조재학, 최만식, 이영욱, 고석진 등이 각 도의 대표를 맡았다. 경기도 최영설, 충청도 유준근, 경상도 권진원, 전라도 이중익·최영례·오계엽·박재구·이권제, 강원도 서상열, 함경도 김성문, 평안도 이도성, 황해도 유응두·오창근·송낙선 등 14명이 각 군의 대표로 참여했다.
하지만 1913년 5월 23일 수원군대표 김창식이 체포되면서 조직이 드러났고, 여러 차례 왜경에 불려 다니던 병찬은 6월 3일 결박 묶인 손으로 자신의 몸 6곳을 찔러 자결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거문도로 유배를 가 2년만인 1916년 5월 66세의 나이로 숨져 순창 회문산 기슭에 묻혔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한말 의병은 임진왜란 의병, 병자호란 의병보다 외로운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한반도 침략의 야욕을 보인 19세기 말부터 1910년 8월 경술국치까지 일본군의 치밀한 추적과 현대식 무기를 동원한 대규모 공격, 조정의 외면 또는 비협조 속에 재래식 무기를 들고 소수의 병력으로 맞서 오로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광주일보 의병열전(1975.12.1~1977.7.21)에서 다룬 한말 남도 의병장은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 심수택(심남일), 임병찬, 전수용, 이기손, 박영근, 신덕균, 김준, 양진여·양상기 부자, 안규홍, 오성술, 기산도, 황병학, 이대극 등 17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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