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윤현석기자

윤선도·편성대·양만용···병자호란 의병장들의 특이한 사연들

by 광주일보 2021. 11. 3.
728x90
반응형

정유재란 때 순국 양산축의 유복자 양만용 정묘호란 거병
편성대 아버지 명나라서 벼슬 지내
시조문학 거성 윤선도 병자호란 거병

윤선도가 살았던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의 녹우당. 15세기 중엽의 건물로, 안채와 사랑채가 ‘ㅁ’ 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사적 제167호.
 

1627년 1월 정묘호란으로 3월 후금과 굴욕적인 화친을 맺은 후 10년 뒤인 1636년 12월 9일 청나라 29만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임진왜란에 이어 호남 의병이 거병했는데, 특이한 사연을 가진 의병장들이 있었다.

명나라에서 귀순한 아버지를 둔 편성대, 정유재란 때 순국한 양산축의 유복자 양만용, 시조문학의 최고봉 고산 윤선도, 임진왜란 당시 거병한 죽천 범기생의 손자 범진후, 정묘호란 당시 석주관을 지키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왕의성 등이 대표적이다.

 

은림 편성대

청강 조수성의 선봉장 역할을 맡은 편성대는 무용이 출중해 독전군관으로 전투에서 전과를 올렸다. 1605년 나주시 동강면 운산리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형복, 호는 은림이다. 그의 아버지 편풍세는 명나라 조정에서 어양안찰사와 일각노 금자광록대부 벼슬을 지냈고, 어머니는 오천 정씨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이여송이 이끄는 4만 군사가 평양 칠성각을 공격하는데 공을 세운 성대의 조부 모헌 편갈송은 간신배 모함으로 조선에서 살기로 결심한 뒤 아들 풍세, 풍원, 산보 등과 경주 금오산에 은거했다. 풍세와 풍원은 나주로, 막내 산보는 전북 만경에 터를 잡았다.

세는 한림학사를 지낸 동생 풍원에게 성대를 맡겨 교육했다. 하지만 성대가 15세에 아버지 풍세가, 곧 뒤이어 스승인 풍원도 세상을 떠났다. 16세에 화순의 안동 김씨를 아내로 맞아 두 아들 응주, 봉을 낳았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청강 조수성의 격문을 보고 31세의 성대는 최명해, 임시태 등과 함께 달려갔다.

조수성은 “의사들을 처음 만나는 자리지만 예의 밝음을 느꼈고 일을 놓고 마음을 통해보니 대의 또한 밝도다. 기재와 웅도를 오랫동안 간직해왔으니 국난을 당해 어찌 택함을 받지 않겠소.”라는 시로 반겼고, 1637년 1월 2일 의병청에는 156명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조수성이 대장을 맡고, 선봉장 최명해, 좌군장 고부립, 중군장 조엽, 우군장 유릉, 후군장 임시태, 독전군관 겸 훈련대장 편성대, 편대장 김무진, 참모 배홍립·김위징·양우전·문제극 등으로 진용을 짰다.

524명으로 불어난 의병을 화순 만연산 기슭에서 훈련시키던 성대는 나주에 있는 편영표에게 편지를 보내 거병을 독려했다. 이후에도 전 한림 양만객, 진사 나해륜, 정지열, 이선집, 이돈, 유시휘 등도 호응했다. 1월 9일 마지막으로 훈련한 뒤 11일 새벽에 출발, 19일 전북 여산에 도착했다. 나주에서 거병한 영표는 16일 나주를 출발해 200여 명의 군사로 장성 갈재를 넘어 합류했으며, 조수성 의병군은 1월 29일 청주 인근에서 청나라 군사와 마주쳤다.

이 때 양만용과 이기발이 5~6명의 군사를 끌고 갔다가 붙잡혔으며, 조수성은 성대에게 50기를 내주며 구출을 요청했다. 성대는 아군 2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할 만큼 격전을 치른 끝에 청나라 군사 9명을 베고 양만용, 이기발 등을 구해냈다. 2월 4일 인조의 항복 소식을 들은 성대는 자결하려 했으나 주위 만류로 실패했으며, 동생 편영표는 끝내 자결했다. 화순에서 은거하던 성대는 69세의 나이에 1673년 8월 26일 사망했으며, 조정은 뒷날 성대에게 가선대부, 이조참판, 전라창의사를 추증했다. 편영표에게는 이조참의가 추증됐다.

거오재 양만용

1598년 3월 24일 광주 광산구 임곡면 박호리에서 태어난 양만용은 정유재란 때 순절한 양산축의 유복자(아버지가 죽은 뒤 태어난 자식)로 태어났다. 양산축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 전사한 충의공 양산숙의 막내동생이다. 양산축은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바로 위의 형 산룡, 어머니, 형수 2명, 자신의 부인인 고씨, 여동생 등과 무안 삼향포로 피난을 갔다가 왜적과 마주쳐 싸우다가 임신중인 산축의 부인만 살아남고 모두 강물에 투신하거나 자결했다.

이후 고씨는 홀로 만용을 키웠으며, 만용은 10세에 영광의 수은 강항의 밑에 들어가 공부했다. 12세에 어머니를 뵙기 위해 집을 찾았으나 고씨가 학문에 정진하라며 만용을 내쫓은 이야기는 유명하다. 1624년 이괄의 난, 1627년 정묘호란 등에 잇따라 거병했으며, 특히 정묘호란 때는 김장생 부대에 합류해 종사관으로 강화도와 전북 완산을 오가는 전령으로 일했다.

이후 대과에 급제, 벼슬길에 올라 한림, 예문관 서비, 시강원 설서, 경연 사관, 예문관 검열, 옥당 등 여러 관직을 동시에 맡기도 했다. 그가 시강원 설서로 있을 때 쓴 만용일기(1634~1635년)은 궁중 내 이야기를 세밀히 기록해 남겨 후세 역사가들에게도 큰 도움이 됐다.

충헌공 윤선도의 15대 종손 윤성철씨.

충헌공 윤선도

조선 시조문학의 거성 윤선도는 1587년 6월 21일 지금의 서울 연지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약이, 호는 고산 또는 해옹을 썼다. 8세에 큰 집에 양자로 가 17세에 남원 윤가인 윤돈의 딸과 혼인했다. 26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한 뒤 조정에 간신 횡포, 심한 당쟁을 비판하는 수천 자의 상소를 올려 자신은 함경북도 경원으로 유배가고 아버지 윤유기도 관찰사에서 파직됐다. 양부 윤유기의 별세 소식에도 가보지 못하고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37세에 석방됐다. 고향 해남으로 내려와 휴양한 뒤 41세에 별시초시에 합격해 이조판서 장유의 추천으로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로 선임됐다. 이 때 인조와 왕비는 5년의 임기를 넘어서 겸직을 윤허하는 방식으로 10년간 사부로 있게 하며 지필묵과 일체의 생활필수품을 하사하는 등 깊이 신임했다. 43세 호조좌랑과 공조좌랑, 46세 사복첨정, 47세 한성서윤을 거쳐 증광향해의 별시에 급제해 예조정랑, 관서경시관, 세자시강원문학 등을 역임했다. 이후 조정 내에서 질시를 받으며, 외직으로 좌천되자 49세에 성주현감을 마지막으로 고향 해남에 낙향해 두문불출했다. 때로는 노비 후대, 빈민 구제 등을 호소하는 시폐사시소(時弊四時疏)를 인조에게 올리기도 했다. 낙향 1년만인 1636년 12월 9일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선도는 5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1637년 1월 7일 육로가 아닌 해로로 강화도로 나아갔다. 1월 24일에서야 강화도에 도착했으나 이미 청나라군이 이틀 전인 1월 22일 점령한 뒤였다. 해남으로 내려오는 도중 삼전도의 치욕을 전해 듣고 통곡하다가 제주도로 향하는 길에 보길도를 보고 정착했다.

보길도 격자봉 아래 부용동이라는 이름을 짓고 낙서재라는 정자를 지어 머물렀다. 이후 인조, 효종, 현종 등의 강권에 못이겨 벼슬길에 나갔다가 조정 당파싸움에 휘말리거나 권신들의 시기로 귀양, 상경, 귀향 등을 반복했다. 81세에서야 비로소 귀양에서 풀려났다. 출사한 뒤 18년을 유배지에서 보낸 그는 1671년 6월 85세에 낙서재에서 사망했다. 숙종은 윤선도를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충헌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광주 북구 생용동의 금성 범씨 제각. 지금은 제각이 사라지고 비석들만 남아있다. 죽천 범기생의 손자인 범진후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부의 뜻을 받들어 거병했다.

양성재 범진후

양성재 범진후는 임란 때 의병장으로 토적에 나섰던 죽천 범기생의 손자로, 1611년 광주 생룡동 범우익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군평, 호는 양성재다. 진후는 임진왜란 당시 김천일의 전라우도의병군에 가담했다가 진주성에서 숨진 죽천 범기생(남강 투신)의 손자다. 5살에 글공부를 시작했으며, 일찍부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했다.

총명하고 무예도 뛰어나 김수금, 정대명 등과 어울렸으며,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성균관 생원에 응시해 합격했다. 이괄의 난 등 난세가 계속되자 대과 응시를 포기하고 고향인 생룡동에서 지냈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복수를 다짐하며 주위 선비들과 병기, 군량을 모아 매달 15일 함께 무예를 연마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나고 인조의 근왕교서가 내리자 400여 명의 의병을 모았으며, 전라병사 김준용과 합세했다.

대장에는 김준용, 부장에 김수권, 좌선봉장에 범진후, 우선봉장에 정대명이 각각 임해 청주, 수원을 지나 용인 광교산에 진을 쳤다. 남한산성에 인근에 도착했다는 신호를 보낸 뒤 청태종의 사위인 백양고라와 전투를 벌였다. 병자호란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끝에 백양고라와 그 부장 등 3명을 사살하고 군량과 화살이 떨어져 후퇴했다.

진후는 인조의 항복 소식을 들은 뒤 광주로 돌아와 두문불출했으며, 조정에서 수차례 출사를 요청했으나 사양했다. 1671년 7월 19일 61세로 사망했고, 후일 정조는 그를 공조참판에 추증했다.

서강 왕의성

왕의성은 정유재란 당시 처참한 것으로 알려진 석주관 전투에서 극적으로 살아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거병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6세에 사서를 읽고 정도로 총명하고, 성품이 온후하며, 자신의 곳간을 열어 빈민 구제에 나설 만큼 인품이 높았다. 22세에 문과에 급제해 종7품 예보사주부에 올랐으나 1년 만에 그만 두고 낙향했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아버지 왕득인은 의성에게 가족 피신을 부탁했으며, 의성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이후 아버지의 석주관 전사 소식을 듣자 시신을 찾지 못해 혼을 불러내 장례를 치른 뒤 복수를 다짐했다. 이정익, 오종, 고정철, 양응록, 한호성 등이 가세하고 화엄사에서 103석의 양식과 승병 153명이 찾아와 진용을 짠 의성은 왜적의 3차례 공격을 견뎌냈다.

그러나 계속되는 왜적의 공격에 결국 석주관은 함락되고, 의병 대부분이 전사했다. 조총에 맞은 의성 역시 죽은 줄 알았으나 기절했다가 3일 후에 기적처럼 깨어났다. 살아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 은신한 그는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62세의 노인의 몸으로 다시 거병했다. 이에 김원건, 한경생, 이순길, 이국성, 김화 등이 군량과 의병을 모아 찾아왔고, 임실 이두연, 곡성 안건 등이 합세해 500여 명을 이끌고 전주에 도착하니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의성은 운량장에 추대됐고, 양만용, 옥과현감 이흥발·이기발 형제, 순창현감 최온, 전 찰방 유접 등과 토적을 맹세했다. 청주에 이르렀을 때 병력 3,038명, 군량 5,022석에 달했고, 능주목사 김원립도 응원에 나섰다. 그러나 인조의 항복 소식을 듣고 세상과 단절한 채 은둔의 나날을 보냈다. 64세로 사망했으며, 후에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에 추증됐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20> 병자호란에 다시 일어선 남도의 의병장들

임진왜란(1592~1598)을 겪은지 30년이 채 안 돼 우리나라는 또 한 번 후금의 대규모 침략을 당했다. 1627년 1월 17일 중원의 강대국으로 성장한 후금이 3만명을 이끌고 의주성을 공격해 의주부윤 이완(

kwangju.co.kr

 

충민공 양산숙, 도끼 멘 채 日 통신사 파견 반대 상소 올려

충민공 양산숙양산숙은 1587년 자신이 26세 때 대마도 도주인 타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가 강화조약 체결을 위해 조선을 찾아오자 남원의 양대박과 함께 국왕의 사신인 것처럼 꾸며 염탐에 나섰

kwangju.co.kr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