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보람기자(예향)

정도전·정약용의 유배지 나주 회진·강진 귤동마을을 가다

by 광주일보 2021. 11. 2.
728x90
반응형

[정도전 유배지 나주 회진현]
단출한 초가 하나 쓸쓸했을 삼봉의 마음 전해져···고립 속에 위대한 사상 피어내
[정약용 유배지 강진 다산초당]
사의재엔 주막 할머니·딸 동상···다산초당 가는 길엔 '뿌리의 길'
목민심서 등 조선 실학 집대성···다산박물관에 흔적 고스란히

다산초당 오르는 길. 일명 ‘뿌리의 길’로 불린다.
 

◇삼봉 민본사상 키워낸 나주 회진현

가을비가 내린 후의 나주 다시면 운봉리 백룡산에 운해가 약하게 드리워져 있다. 삼봉 정도전(1342~1398) 선생이 머물렀던 초가를 찾아가는 길이다.

삼봉 선생은 고려 말 정치가이자 성리학자였으며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인 인물이다.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성리학적 사상에 입각해 새로운 국가를 설계한 혁명가이자 조선 왕조 창업을 이끈 정치가, 철학자,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그런 그가 시골 변방에 쫓겨났던 건 어떤 사연 때문이었을까.

충청도 단양 삼봉 출생인 삼봉은 부친 정운경을 따라 개경에 와 스승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이숭인 등과 유학을 배웠다. 22살에 과거에 급제해 관직 생활을 시작하고 1370년 스승 이색이 대사성이 되면서 성균관 박사가 된다. 친명파인 삼봉은 1374년 공민왕의 죽음으로 친원파였던 이인임의 미움을 받게 되고, 이듬해 원나라의 사신의 마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나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처음 나주로 내려온 삼봉은 농부 황연의 집 한 칸에 세들어 살다가 동네뒤쪽 산 아래에 조그만 집을 지어 살았다. 방 한 칸과 마루 한 칸이 전부인 초가였다.

3년간 이곳에서 생활했으니 머물렀다는 표현이 맞겠지만 죄인의 신분으로 쫓겨와 가택연금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삼봉에게 나주는 썩 달가운 지역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삼봉은 이곳에서 정치적 격동기 백성들의 고통을 눈으로 확인했으며, 그들의 따뜻함을 몸소 체험하면서 ‘백성이 먼저’라는 민본 사상을 더 급진적으로 변화시켰다고 전해진다.

삼봉은 이곳에서 지내며 농민들의 인심에 감동을 받았고 ‘소재동기’를 남긴다. 유배지에서 백성들과 함께 생활했던 경험은 이후 민본사상의 근간이 되었다.

삼봉 정도전이 살았던 나주 회진현(지금의 다시면 운봉리 백동마을) 유배지 터. 2010년 복원된 초가 하나가 외로이 자리하고 있다.
 

‘삼봉 정도전 유배지’를 검색하면 전남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백동마을이 바로 뜬다. 고려 당시에는 회진현 거평부곡 소재동이라 불리는 촌락이었다. 도로를 벗어나 농로를 따라 한참을 들어가지만 곳곳에 안내판이 설치돼 있어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다.

‘개혁가’, ‘조선 개국 공신’ 삼봉 선생의 수식어와는 한참 떨어진, 더없이 단출한 초가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나마 대나무로 둘러진 울타리에 판자로 사립문을 내어 유적지임을 알게 해주었다.

지금의 초가는 2010년 복원된 것이다. 본래 초사는 사라졌다가 1988년 나주시가 백룡산 기슭에 소재동이 있었음을 확인하고 뒤늦게 복원에 나섰다고 한다.

마루에는 정도전이 유배지에서 쓴 시조인 ‘중추가’(아래)가 걸려 있다.

잠겨진 문고리 아래 토방에 검정 고무신 한 켤레가 놓여있다. 구멍난 창호를 통해 들여다 본 방안에는 삼봉의 초상화 하나가 걸려 있고 마루에는 삼봉의 시 ‘중추가’가 걸려 있다.

초가 뒤편 대숲을 한참을 바라보다 다시 마루앞에 서서 들녘을 바라본다. 보이는 건 논밭 뿐인 곳에서 암담하고 쓸쓸했을 삼봉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 하다.

정약용이 10여 년간 머물렀던 만덕산 기슭 다산초당.
 


◇조선 실학 집대성한 강진 다산초당

한자가 발명된 이래 최고의 사상가로 평가받던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시대 문예부흥기를 이끌었던 개혁군주 정조대왕(1752~1800)의 신임을 받은 인물이다.

그를 아끼던 정조의 급작스러운 승하는 다산의 유배로 직결된다. 1801년 신유교옥(천주교 박해사건) 과정에서 그의 형제와 친지들은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유독 사이가 각별했던 다산과 형 정약전은 나란히 귀양길을 떠났다가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을 향하며 마지막 이별을 하게 된다.

18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이곳에서 머물렀던 영향일까? 강진에는 다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가 머물렀던 곳은 ‘다산실학의 4대 성지’로 불리기도 한다.

다산이 강진에 유배와서 처음 묵었더 사의재. 다산에게 방을 내어준 주막 할머니와 외동딸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사의재(四宜齋)’는 다산이 1801년 겨울 강진에 유배와서 처음 묵은 곳이다. 지칠대로 지친 몸을 처음 의지한 곳이 이곳 사의재다.

주막이었던 동문매반가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골방 하나를 거처로 삼아 이곳에서 1805년 겨울까지 만 4년을 머물렀다. ‘사의재’는 다산이 지은 이름으로 ‘네 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주막 할머니의 얘기에 1802년 10월부터 최초 제자 황상 등 제자들에게 스스로 편찬한 ‘아학편’을 주 교재로 교육을 베풀었다.

지금의 사의재는 강진군이 오랜 고증을 거쳐 2007년 동문 안쪽 우물가 주막 집터를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초가에는 ‘사의재’ 현판이 걸려있고 마당 한쪽에는 주막 할머니와 외동딸의 모습을 형상화 한 주모상(像)이 세워져 있다. 사의재 왼편에는 주막(동문매반가)이 재현돼 있고 파전과 동동주 등 토속적인 음식을 판매하는 현대판 주막으로 운영되고 있다.

다산이 사의재를 나와 찾아간 곳은 고성사(고성암)내 보은산방이다. 보은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1805년 겨울부터 1806년 가을까지 1년 가까이 머물면서 강진읍 6제자를 교육하며 52편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이후 강진읍 6제자 중 막내인 이청의 자택으로 거처를 옮겨 2년 가까이 머물며 교육과 연구에 정진한다.

1808년 봄, 다산은 이청 집에서 도암면 귤동마을 초당으로 거처를 옮긴다.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이곳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1818년 유배 해제까지 10여 년을 머물렀다.

다산초당은 본래 윤단의 산정(山亭)으로 후손들을 가르치기 위해 1000여 권의 장서까지 갖춰놓은 가문의 도서관 같은 곳이었다고 전한다. 다산은 이곳에서 윤단의 손자 6명을 포함한 초당 18제자를 교육하고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 권에 달하는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 했다.

다산초당을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산길이 시작된 곳에서 초당까지 0.3㎞라는 안내판을 보고 가벼이 생각했다가 급히 반성을 하고 만다. 다산초당을 오르는 길은 ‘뿌리의 길’로 많이 알려져 있다. 땅 속에 있어야 할 나무의 뿌리들이 모두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듯 하다. 다산이 이 길을 오르내리며 느꼈을 여러 고뇌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짚으로 지붕을 지은 초가를 생각했더니 눈앞의 다산초당은 팔작기와지붕에 정면 5칸의 가옥이다. 다산은 본채인 이곳을 서재로 사용하고 초당 옆 동암을 숙소로, 서암을 제자들의 숙소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원래 목조 초가였던 다산초당은 1936년 노후로 붕괴되었던 것을 1957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목조 와가로 복원했다. 이후 동암과 서암도 복원됐다. 현판에 판각된 ‘茶山艸堂’ 글씨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한 것이다.

다산초당에서는 다산이 남긴 흔적들을 찾을 수 있다. 일명 ‘다산 4경’이다. 초당 뒤쪽 큰 바위에 다산이 직접 새겼다는 ‘丁石(정석)’이 1경, 다산이 직접 수맥을 짚고 팠다는 ‘약천’이 2경, 차를 끓일 때 사용한 마당의 평평한 돌 ‘다조’가 3경이다. 4경은 초당 옆 연못인 ‘연지석가산’이다.

다산초당 왼편으로 난 오르막을 오르면 ‘천일각’이 자리한다. ‘하늘 끝 한 모퉁이’를 뜻한다. 휴식을 취할 때, 정조대왕이 그리울 때, 고향이 생각날 때, 멀리 흑산도로 유배간 큰형 정약전이 그리울 때 서 있었다는 곳. 천일각에 올라서니 멀리 강진만과 칠량, 천관산이 바라보인다. 천일각 왼편으로 백련사로 향하는 작은 오솔길이 나 있다. 천연 동백숲과 야생차가 보이는 이 길을 통해 백련사를 오고 갔을 것이다. 백련사에는 다산보다 10살 연하인 혜장선사가 있었는데 교류하며 차를 배웠다고 전해진다.

강진군 도암면에 자리한 다산박물관. ‘목민심서’ 필사본 등 유물 300여 점을 소장·전시하고 있다.
 

다산초당을 뒤로하고 다산박물관으로 향한다. 다산초당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박물관은 조선 최고의 실학자 정약용의 18년 유배지 강진에 남겨진 흔적을 기념하기 위한 곳으로 2014년 다산기념관으로 개관했다가 이후 다산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다산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남긴 ‘목민심서’, ‘흠흠심서’ 필사본, 아들 정학연을 포함한 가족과 주변 인물들 사이의 친필서간, 외손자 윤정기가 제작한 10폭의 병풍 등 유물 300여 점을 소장·전시하고 있다.

/이보람 기자 boram@kwangju.co.kr
/사진=나명주 기자 mjna@kwangju.co.kr

 

 

유배지에서 성찰하고 위로받다

각박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유배문화와 전남 유배지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손암 정약전과 다산 정약용 형제, 추사 김정희, 우봉 조희룡, 원교 이광사 등은 당대에 죄인으로 신

kwangju.co.kr

 

[폭 넓어진 아트컬렉션] 올 가을 우리집에 그림 한점 걸어 볼까

얼마전 새 아파트로 이사한 주부 권혜신(45)씨는 오랫동안 모아온 목돈으로 통큰 지출을 했다. 값비싼 가구 대신 평소 눈여겨 봐둔 서양화가의 작품을 구입해 거실에 걸어둔 것이다. 주변에선 “

kwangju.co.kr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