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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석기자

[임란 의병장들의 거병 전 행적] 충민공 양산숙, 도끼 멘 채 日 통신사 파견 반대 상소

by 광주일보 2021.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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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란, 방탕한 자들 동헌서 매질···심우신, 토지 수탈 시정 강력 건의
유팽로, 왜적 침입 대비 3번 상소···양대박, 천문 보며 임진왜란 예측
기효증, 부친 객사에 벼슬길 포기

기효증은 임란이 끝난 뒤 광주 광산에 낙향해 아비자인 고봉 기대승의 묘소 옆에 칠송정을 짓고 학문에만 힘썼다. 1614년에는 아버지를 위해 기고봉문집을 발간했다. 사진은 기대승의 위패가 모셔진 광주 월봉서원.
 

충민공 양산숙

양산숙은 1587년 자신이 26세 때 대마도 도주인 타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가 강화조약 체결을 위해 조선을 찾아오자 남원의 양대박과 함께 국왕의 사신인 것처럼 꾸며 염탐에 나섰다. 동래부사가 사신을 대접하는 자리에서 일부러 적의를 보이기 위해 잔을 깨기도 하고, 말을 탄 채 타치바나와 인사하는 등 신경전을 벌였다. 양산숙과 양대박은 상주목사 송응동이 잔치를 베풀자 이를 비웃는 타치바나를 보고 향후 왜적의 침략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깊이 탄식했다. 이후 통신사 파견을 반대해왔으며, 1590년 3월 선조가 황윤길을 정사로 한 통신사 파견을 결정하자 여러 선비들과 함께 한양까지 가 거적을 깔고 도끼를 멘 채 반대 상소를 올렸다.

충경공 이정란

어릴 때부터 활쏘기, 말타기 등 무예를 익힌 이정란은 15세에 어머니 김씨가 별세하자 삼년상을 치렀다. 경전에 밝아 동생 이정기를 가르쳤으며, 정기는 ‘호남제일의 문’이라는 전주 풍남문이라는 글을 쓸 정도의 명필로 이름을 날렸다. 1568년 40세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등용되지는 못했고, 1572년 아버지인 이승효가 돌아가신 후 1575년에서야 교서정자(정9품)에 제수됐다. 1578년 50세의 나이로 충남 서산의 해미현감으로 부임했으며, 그 이후에는 한직을 전전했다. 정여립의 난 이후 1590년 개성도사에 임명돼 부임했는데, 부역이나 납세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등 문란해진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조정 중신의 배경을 믿고 방탕한 자들을 동헌에서 매질해 본보기로 삼았다.

표의장 심우신

18세에 이억년의 딸 전주이씨와 결혼했으나 2년 만에 상처했으며, 24세에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이 됐다. 25세에 왕명으로 영광에 왔다가 유독 다소곳한 선무랑 임식의 딸 장흥 임씨에게 반한 뒤 영광군수의 중매로 결혼해 아들 셋을 뒀다. 임식에게 1,000여석을 거둘 수 있는 농토도 받았다. 오위도총부도사를 지낸 뒤 옹진현령으로 있었으나 토지 수탈의 시정을 감사에게 건의했다가 다툼이 나자 사직하고 두문불출했다. 36세에 아버지 심수가 별세하자 삼년상을 지내다가 38세에 사암 박순의 추천으로 강원도 홍주판관에 제수됐다. 2년 후 평양도호부판관, 46세에 군기사첨정(종4품)에 올랐으나 신병 문제로 3개월 후 사임했다.

월파 유팽로

풍족한 집안에 태어난 유팽로는 25세에 과거에 급제했다. 무예에도 힘썼으며, 말 타는 솜씨는 김덕령과 비견되기도 했다. 승문원 부정자(종9품)를 제수받고 김상헌 등 소장파 학자들과 어울렸는데, 1590년 봄 아버지가 별세하면서 낙향했다. 삼년상을 지내며 3차례 상소를 올려 왜적 침입 대비를 호소했으며, 1592년 2월 성균관 학론으로 임명된 뒤 임란이 발생하자 왜적을 무찌를 수 있는 계책을 올린 것으로 전해진다.

광주 광산구 박호동에 있는 양씨삼강문.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순절한 양산숙 등 제주양씨 일가 6인의 충·효·열행을 기리는 정려문으로, 1635년에 세워졌다. 이곳에는 충신 양산숙을 비롯해 양산숙의 형제인 양산룡과 양산수, 양산숙의 모친 죽산박씨, 처 광산이씨, 양산룡의 딸인 김광운 처 양씨 등이 모셔져 있다.
 

충장공 양대박

양대박은 외동아들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 18세에 부사직 신지의 딸 고령 신씨와 혼인해 25세에 맏아들 경우, 31세에 둘째아들 형우를 얻었다. 육예(六藝, 禮樂射御書數)와 구류(九流, 유가·도가·음양가·법가·명가·흑가·종횡가·잡가·농가), 병법 등에 관심을 가졌다.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사암 박순,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등과 교류하고 김천일, 변사정 등과 병법과 진법을 함께 논했다.

1586년 이래 왜구의 계속되는 침략에 병법 공부를 시작했으며, 당시 천문을 보며 임란을 예측하기도 했다. 대박은 광한루에 올라 지리산 등 산천을 굽어보며 “10년 안에 누각이 불에 탈 것”이라고 예상했다. 1590년 3월 선조가 일본 사신들의 통신사 파견 요청을 수용하자 우의정 송강 정철에게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보냈는데, 송강은 “이 종이 한 장이 가히 백만의 스승보다 낫도다”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광주 북구 생용동에 있는 죽천 범기생의 숭모비. 1962년 후손인 범준영씨 등이 세웠다. 범기생은 김천일을 따라 진주성에 입성한 후 왜적에 의해 함락되자 41세의 나이에 진주 남강에 투신해 순절했다.
 

죽천 범기생

25세에 아버지 범홍노가 별세하자 삼년상을 치르며, 흉년이 들자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위해 곳간을 열였다. 삼남지방에 흉년이 계속되자 기생은 구민 불교에 심취하게 되고, 산학(産學)에 힘썼다. 왜구 침입이 계속되자 기생은 동생 기봉에게 말 한 필을 구해오라고 한 뒤 말 타기, 활쏘기 등 무예를 익혔다.

형제의병장 홍민언·홍민성

홍민언과 민성은 사촌간으로, 중봉 조헌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율곡 이이, 송강 정철 등과 문답을 주고 받으며, 스승인 조헌과 밤새 토론을 즐겼다. 조헌이 침랑, 첨정, 주부 등에 추천했으나 모두 사양하기도 했다.

함재 기효증

고봉 기대승의 큰아들로 청렴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긴 탓에 가난했다. 기대승은 23세에 벼슬길에 나갔으나 자신의 사상과 어긋난다하여 4~5차례 낙향했으며, 조정의 부름을 받아 다시 벼슬길에 오르기를 반복했다. 기대승은 1572년 11월 1일 마지막 낙향길에 전북 고부에서 객사했으며, 어려운 집안 처지를 알고 있던 사간원이 장례를 관에서 치르도록 선조에게 상소를 올려 재가를 받았다. 1570년 21세의 나이에 사마시에 합격한 효증은 아버지 죽음에 벼슬길을 포기하고, 동생들을 보살폈다. 여동생은 장성의 하서 김인후의 손자인 김남중과 혼인시키고, 두 동생인 효민과 효맹을 독립시켰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의병장 태몽과 어릴적 이야기]
나주 금성산 울고 난 후 김천일 태어나···호랑이 두마리 들어온 꿈꾸고 김덕령 출생

문열공 김천일은 1537년(중종 32년) 5월 나주군 신촌면 흥용동(나주읍 송월리)에서 태어났다. 금성산이 병풍처럼 두로고 나주평야를 앞에 둔 지형인 이 마을에서 그해 5월 들어 산이 울기 시작했으며, 노인들은 이를 길조라고 반가워했다. 가난한 선비 김언침과 아내 양성 이씨는 금성산의 울음이 그친 3일만에 아들 천일을 얻었다.

최경회의 아버지인 최천부는 향리로 후진 양성에 힘써 10여 명의 제자가 과거에 합격했다. 화순의 부호이자 진사인 임철공이 15세의 최천부를 보고 마음에 들어 자신의 사랑방에서 글공부 하기를 권유했다. 관상에 능했던 임철공은 최천부를 정승 재목으로 보고 자신의 딸인 순창 임씨와 혼례까지 치르게 했다.

혼례식에 최천부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던 임철공은 최천부가 뒤돌아서는 모습에서만 정승 모습이 보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최천부가 죽은 후에 정승에 오른다는 의미다. 실제로 최천부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이끌고 왜적에 맞선 맏아들 최경운, 둘째아들 최경장, 막내아들 최경회 등 삼형제 덕에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으로 증직됐다.

형제의병장 강희보와 강희열은 순천부사를 지낸 아버지 강천상과 어머니 청풍 김씨 사이에서 1561년 8월 13일, 1562년 9월 15일 각각 태어났다.

광양군 봉강면 신기촌(신촌리)에 살던 강천상 부부는 혼인 3년이 지나고도 자녀가 없어 걱정이 컸다. 그러던 중 청풍 김씨가 광양의 백운산 형제봉이 집에 들어와 우뚝 선 뒤 다른 봉우리들도 들어오는 태몽을 꾼 뒤 이들 형제를 출산했다고 전해진다.

지모와 용력을 한 몸에 지닌 김덕령은 1568년 12월 29일 광주 석저촌(충효리)에서 태어났다.

덕령이 태어나기 전 눈이 내리는 무등산에서 두 마리의 호랑이가 내려와 가난한 선비인 덕령의 아버지인 김붕변의 집 안방 앞에 앉아있었다. 마치 김붕변의 아내 남평 반씨의 해산을 기다리듯 아이 울음소리가 터져나오자 호랑이 두 마리는 집 뒤 대밭을 지나 무등산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남평 반씨는 10개월 전 호랑이 두 마리가 방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

삼도 임계영의 어머니인 김씨 부인은 황룡이 승천하는 태몽을 꾼 뒤 남편 임희중에게 비밀로 했다. 이후 몸보신을 위해 잡아둔 자라를 풀어줄 것을 남편에게 요구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528년 4월 9일 다섯째 아들인 계영이 태어났다. 이후 임씨 집안에서는 대대로 자라를 안 먹는다고 한다.

1549년 4월 하순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에 사는 모의장 최대성의 아버지 최한손의 처 경주 이씨가 노비 3~4명 데리고 뒷산 초암산(일명 금화산)에 올랐다. 시집 1년이 채 못 된 이씨가 초암산 동굴을 구경하다 정화수 그릇에 인근 샘물을 담아 신선에게 바쳤다. 그리고 마음껏 이 샘물을 마신 뒤 10개월만에 최대성을 낳았다고 한다. 나중에 이 동굴은 임란 당시 최대성의 누이동생이 이곳으로 피난해 베틀을 짰다고 해서 베틀굴로 불렸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18> 임란 의병장들의 거병 전 행적 ②

임진왜란 의병장들은 거병 전에는 조정에 출사해 벼슬을 지낸 뒤 귀향했거나 여러 이유로 초야에 묻혀 학문을 수양한 양반이었다. 이들은 어릴적부터 글, 무예 등에서 남다른 솜씨를 보여 일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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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의병장들의 거병 전 행적 ①

임진왜란 의병장들은 거병 전에는 조정에 출사해 벼슬을 지낸 뒤 귀향했거나 여러 이유로 초야에 묻혀 학문을 수양한 양반이었다. 이들은 어릴적부터 글, 무예 등에서 남다른 솜씨를 보여 일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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