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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석기자

임란 의병장들의 거병 전 행적 ①

by 광주일보 2021.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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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명, 26세 문과 장원급제…성균관전적·호조좌랑 지내
문열공 김천일
군기사주부 출사, 수원부사 역임
높은 인품·학문, 후학 양성 전념
오봉 정사제
사마양시 거쳐, 문과 병과 급제
전쟁 감지 육도삼략 등 병법 공부

 

호남 의병 가운데 가장 용맹한 장군으로 이름이 높은 충장공 김덕령의 초상화. 그는 혼자 석성을 짓고, 300리길을 말을 타고 반나절만에 내달리는 등 무예와 말 타는 솜씨로 유명했으며, 그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전해내려오고 있다.

임진왜란 의병장들은 거병 전에는 조정에 출사해 벼슬을 지낸 뒤 귀향했거나 여러 이유로 초야에 묻혀 학문을 수양한 양반이었다. 이들은 어릴적부터 글, 무예 등에서 남다른 솜씨를 보여 일찍부터 이름을 알렸다. 구국충절의 깃발을 들자 인근에서 수 백, 수 천명이 몰려올 만큼 인품이 높은 것도 특징이다. 임란 의병장들의 거병 전 행적을 짧게 정리했다.

충렬공 고경명

명종 7년(1552년)은 20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한 뒤 21세에 홍문관 부제학의 딸 울산 김씨와 혼인했다. 26세에 문과(갑과)에 장원급제하며 관직에 올라 성균관 전적, 호조좌랑, 세자시강원 사서 등을 지내다 28세 때 정시 1등에 합격하며 중종으로부터 말 한 필을 받았다. 사간원 정언, 형조좌랑, 사간원 헌납,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수찬, 홍문관 부교리 등 지내다가 31세에 인순왕후의 외숙인 이조판서 이양의 횡포에 대한 조사에 홍문관 교리로 참여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사 사실을 이양에게 귀띔해줬다는 이유로 울산군수로 좌천되자 사표를 내고 귀향했다. 18년 동안 광산 대촌에 묻혀 살다가 선조 14년(1581년) 49세의 나이에 영암군수로 재기용됐다.

 

1601년 고경명 등을 배향하기 위해 지어진 포충사. 고경명은 26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벼슬길에 올라 58세의 나이에 고향에 내려온 뒤 임진왜란 발발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거병했다.

명나라 황태자 탄생 축하 사신으로 김계휘와 다녀온 뒤 서산군수에 부임했다. 50세에 율곡 이이 종사관으로 황주에서 명나라 사신을 접대했으며, 51세에 한성부 서윤, 한산군수, 예조정랑 등 거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2년 뒤 문장에 비해 벼슬이 낮다는 임금의 뜻으로 3계급이 상승해 군자감정에 임명된 뒤 또다시 사표를 냈다. 이후 송강 정철의 추천으로 58세의 나이에 승문원 판교를 거쳐 마지막 벼슬인 동래부사를 지냈다. 첫째아들 종후는 17세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24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해 예조좌랑, 임피현령 등을, 둘째아들 인후 역시 19세에 진사, 29세에 문과에 급제해 성균관 학유를 지냈다.

 

나주에서 거병한 김천일은 하서 김인후, 미암 유희춘, 소제 노수신 등 당대의 학자들이 치하할 정도로 높은 인품과 학문으로 유명했다. 사진은 김천일이 거병한 정수루 인근의 나주목문화관.

문열공 김천일

하서 김인후에게 호남에서 처음보는 인재라고 호평을 받은 김천일은 21세에 장남 상건을 낳고 22세 때인 명종 18년(1563년) 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됐다. 뒷날 부제학을 지낸 유희춘은 미암일기에서 “천일은 생원시험에 4위로 합격했으나 그의 인품과 학문은 호남 8성에서 가장 낫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창평에서 태산서사를 차려 학문을 가르쳤다. 박희안, 조세경 등과 교류하며, 진도로 귀양 온 소제 노수신(선조 즉위 후 이조판서, 대제학 거쳐 영의정에 오름)과 사귀기도 했다. 복암강가에 극념당을 지었는데, 사암 박순, 재봉 고경명 등이 찾아와 천일과 사귀었다. 유희춘과 전라감사의 추천을 받아 37세에 군기사 주부(종6품)로 출사했으며, 이 때 토정 이지암, 월천 조목과 함께 등용됐다. 그 해 가을 용안현감(전북 익산)으로 자리 옮겼고, 선조 9년(1576년) 정월 강원도사, 5월 경상도사에 임명됐다. 같은 해 6월 스승 이항의 부고를 전해듣자 벼슬을 버리고 태인으로 가 장례를 지낸 뒤 동문들과 남고서원을 세웠다. 1578년 선조가 천일을 사헌부 지평(정5품)에 임명하자 선조에게 인재 등용을 건의하기도 했다.

율곡 이이가 부정부패 일소를 위한 7개 시정책과 국방력 강화를 위한 10만 양병론을 주장했으나 묵살되자 낙향했는데, 이이를 만류하던 천일도 벼슬을 버리고 다시 창평에 내려왔다. 이후 우의정 노수신의 천거로 임실현감, 순창군수 등을 지내다 선조 18년(1585년) 여름 호남에 가뭄이 들자 담양부사로 내려왔다. 이듬해 이 역시 그만두고 창평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아들 건상도 사포서별좌로 임용됐다. 선조 22년(1589년) 천일은 한성부서윤을 거쳐 정여립의 난 이후 수원부사로 옮겼다. 수원에는 권신들의 토지가 상당히 있었는데 천일이 세금을 제대로 걷자 반발이 심했다. 그러자 “나는 임금의 신하이지 권신의 마름꾼이 아니다”며 53세에 완전히 귀향했다.

충의공 최경회

9살에 형 경장(12살), 경운(15살)과 시를 짓는 등 남다른 어린시절을 보냈다. 송정 양응정에게 3년간 학문을 배우다가 아버지 최천부의 위독 소식에 귀가했다. 3년상을 치른 뒤 고봉 기대승 문하에 들어가 30세에 생원시험 2등, 진사시험 3등, 36세에 과거에 급제했다. 사암 박순의 추천으로 43세에 사헌부 감찰에 임용된 뒤 형조좌랑, 전북 옥구현감을 거쳐 46세에 장수현감으로 옮겨 5년간 부임했다. 여기서 서당훈장 주달문의 딸인 논개(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 등 4갑술생)를 만나 나중에 부실로 삼았다. 이후 영암군수, 호조정랑, 형조정랑, 경남 영해부사, 담양부사 등을 거쳤다.

형제의병장 강희보·강희열

강희보는 17세에 승주 인동 장광석 2년와 강희열은 18세에 여산 송씨 계수의 딸과 혼인했다. 희보는 20세에 신촌서원을 세워 학문 정진과 제자 양성에서 힘썼고, 희열은 28세에 무과에 급제해 봉사(종8품)에 올랐다. 희열은 임란 발발 1년 전에 구례 석주관에 부임했으며, 희보는 강진 등에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제자들에게 무예를 익힐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오봉 정사제

5살에 현학처사 정근에게 글을 배워 10살에 소학을 익혔다. 11살에 양친 장수를 기원하는 시를 지었고, 13세에 죽천 박광전, 14세에 퇴계 이황 등을 찾아가 배웠다. 15세인 1570년 12월 퇴계 이황이 서거하자 스승을 위한 만사(輓詞)를 지어 바쳤다. 20세에 전국 유람 길에 올라 1년만에 귀향하자 30여 명의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30세에 사마양시에 합격했으며, 31세에 아버지 정성이 별세하자 삼년상을 지냈다. 36세에 문과 병과에 장원급제해 승문원 정자(정9품)에 올랐으며, 그해 12월 서울에 봉화가 올라오는 꿈을 꿔 전쟁 징조를 감지한 그는 1591년부터 육도삼략 등 병법 공부에 나섰다.

충장공 김덕령

14세에 부친이 사망하고, 곤궁해지자 형 덕홍, 동생 덕보 등과 작은 아버지가 살던 동복현 복천 석교천(화순군 남면)으로 이사했다. 여기서 물고기를 잡아 어머니를 봉양했다. 힘과 지혜를 가진 누이와의 내기가 이야기로 전해내려온다. 누이는 무명베로 덕령의 도포를 만드는 사이 덕령에게 환벽당 밑 언덕에 석성 50m를 축조하게 하거나 씨름판에서 어른들을 물리쳐 교만해진 덕령을 혼내주는 등 어린시절 덕령에게 큰 영향을 줬다. 학문과 무술 익히기에 전념하며 직접 칼 제작에 나서기도 했는데, 석저촌(총효리)에서 6km 떨어진 무등산 600m 기슭 주검동이 있다. 덕령은 거병 전에 이곳에서 칼과 창을 만들었다. 17세에 지역인재로 추천됐고, 18세부터는 덕홍, 매형 김응회 등과 우계 성혼의 문하로 들어가 공부했다. 홀어머니가 병환으로 드러눕자 당시 신의라고 알려진 진주의 김남을 자신의 말에 태워 와 어머니를 치료하게 하기도 했다.

김남은 나중에 “무명베로 자신을 묶고 눈을 감게 하고 질풍처럼 300리를 달려 그의 집에 닿으니 그는 절세의 이인이요 말은 신마였다”고 적었다. 이 때부터 덕령의 무예와 말 타는 솜씨가 전라도에 널리 알려졌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알려왔습니다

순천 목천장씨 대종회에서 순천 수성장으로 있다가 임계영 의병에 참여,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전사한 충의공 장윤 장군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요청해왔습니다.

충의공 장윤 장군은 선전관, 훈련원정, 사천현감을 역임한 무신으로, 1582년(선조 15년) 무과에 급제했다. 임란이 발발하자 임계영의 전라좌의병 부장(副將)이 돼 성산·개령에서 왜적과 전투를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진주성에 들어간 뒤 창의사 김천일, 충청병사 황진, 경상우병사 최경회 등과 함께 진주성 혈전을 지휘했으며, 황진이 전사한 뒤 대장이 돼 8일간 적과 싸우다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1649년 장윤 장군을 기려 정려가 하사됐으며, 1686년 정충사에 배향됐다. 이후 병조참판으로 추증되고 충의하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1859년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됐다.

 

 

<16> 의병장들의 화려한 승전의 기록 ⑥

임란 의병장들에 대해 조정은 시호와 벼슬을 내리거나 더 올려주며 그 공을 기렸다. 특히 시호는 가문의 큰 영광으로 여겼다. 또 정려나 사당을 지어 배향하게 하면서 후손과 지역민들에게 충신

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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