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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석기자

[호남 의병 이야기<12>] 의병장들의 화려한 승전의 기록 ②

by 광주일보 2021.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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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령·권율, 수륙연합 ‘장문포 전투’ 왜적 소굴 점령
정사제, 3차례 성주성 전투 활약
임계영, 경북 선산·개녕·성주서
왜적 몰아내 주민들로부터 칭송
변사정, 영동 황간 주둔 왜적 기습

남도 의병장들은 정규 훈련을 받은 적 없고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양반, 농민 등을 이끌며, 신무기 조총을 지닌 정규군 왜적들과 맞섰다. 남도 의병은 충남 금산성, 수원 독산성, 경남 진주성 등 타 지역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물러섬없이 처절히 싸우다 전사했다는 점에서 그 구국충절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광주일보 ‘의병열전(1975.12.1~1977.7.21)’에 명시된 의병장들의 전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오봉 정사제
임계영 의병의 종사관으로 전장에 참여한 오봉 정사제는 의병들에게 3일치 식량을 가지고 백마 피를 나눠 마시며 맹서하도록 시켰다. 맹서의 내용은 여색과 재물을 탐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최경회 의병과 합동작전에 합의하고 1592년 8월 20일 무주, 금산 방면으로 나아가 전라도 침입을 노리는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 다치바나(立花宗茂) 등을 견제해 물러가도록 했다. 

경상감사 김성일의 지원 요청을 받은 임계영의 지시로 거창, 합천까지 진출한 정사제는 의병장 정인홍과 합류해 성주성 공략에 나섰다. 도체찰사 정철, 경상감사 김성일 등이 운봉현감 남간, 구례현감 이춘원의 정병 5,000여 명을 보내주면서 의병과 관군 2만5,000명에 이르렀다. 당시 가쓰라(桂元網)의 성주성 병력은 1만 명 내외로 추산됐다. 8월 19일 합천 해인사에서 작전회의를 한 뒤 21일 1차 공격에 나섰지만 구원에 나선 왜장 모리(毛利輝元)의 부장 요시미(吉見元賴)의 급습에 패퇘했다. 김면과 정인홍을 중심으로 9월 11일 제2차 공격에 나섰지만 또다시 패배했다.

의병들이 연합작전이 제대로 안 되고 군웅할거식 전투가 실패의 원인이라고 생각한 정사제는 10월 10일 임계영을 대신해 선조에게 올릴 상소문을 작성하는데, 그것이 유명한 ‘진창의토벌사소’다. 그는 자신의 하인 보리쇠 등 4명과 함께 소금장수, 지물장수, 죽물장수, 김장수 등으로 위장해 평안도 의주까지 12일만에 찾아가 직접 선조에게 이를 바쳤다. 

 

선조로부터 분의사로 임명된 그는 10월 29일 다시 내려와 가쓰라와 무라가미(村上景親)가 지키고 있던 성주성 3차 공격에 나섰다.11월 7일 정사제가 매복 공격으로 왜적에 타격을 입힌 뒤 11월 10일 의병장들이 작전회의를 한 뒤 14일 일제히 공격했다. 장윤이 200명의 왜적을 사살하고 400명의 포로를 구해내는 등 맹활약했으나 성주성 3차 전투에서 소상진, 남응길, 양자하 등이 전사했다. 패퇴한 뒤 성안에 머물던 왜적은 1593년 1월 15일 철수를 시작했으며, 2월 2일 이들을 추적한 정사제 등은 왜적 400여 명을 사살했다. 

 

정사제는 비변사에게 장수들 공적을 보고하고, 조정은 왕실을 보호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임계영과 헤어져 300여 기병을 거느리고 북상하던 정사제는 6월 중순 진주성의 함락 위기를 전해듣고 남하하다가 6월 30일 곡성 송치에 도달해 진주성 함락 소식을 듣고 통곡했다.

이후 구례 두류산에 진을 치고 왜적을 공격했고, 도주하는 왜적을 쫓아 남원에 도달했다. 1594년 3월 남원에 운집하는 왜적을 공격하기로 다짐하고 진을 친 정사제는 “왜적의 침입에 분하고 원통해 부모님 무덤을 눈물로 하직하고 창칼을 들어 의병을 일으켰네, 사람으로 태어나 하고자 한 충효를 다하지 못한 채 이제 죽음 길에 이르니 한만이 서리는구나”는 유언과 같은 시를 남기고 5월 9일 오전 10시 남원성을 공격했다. 20여명의 왜적을 벴으나 중과부적으로 조총을 맞고 숨졌다.

◇충장공 김덕령
김덕령이 1593년 어머니 상중에 담양에서 의병 일으키니 소문을 듣고 5,000여 명의 의병이 몰려들었으며, 권율은 덕령의 의병을 초승군이라 부르고, 분조한 광해군은 덕령에게 익호장군이라는 호를 하사했다. 선조는 이정암의 장계를 받은 후 교리 권협을 보내 덕령에게 충용이라는 군호와 함께 충용장군으로 명하는 교서를 내렸다. 남원의 군영에 호랑이가 뛰어들자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아 용맹함을 보였다. 전주의 광해군과 삼도체찰사 윤두수가 덕령을 만나기를 청하자 오추마(천리를 달리는 말)를 타고 바로 전주로 간 그는 이들 앞에서 무예 시범을 보였다. 100여m 밖의 버들나무 가지를 화살로 명중시키고, 양손에 100근 무게의 쌍철퇴를 들고 소나무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렸다. 이어 사모창을 들고 나는 듯이 뛰어다니자 광해군 등이 “무예가 항우, 조자룡보다 낫다”는 칭찬했다고 전해진다. 선전관에 임명된 뒤 권율 휘하에서 곽재우와 함께 경북 고령군 일대를 맡아 지키다가 호남의 관문인 진주로 향하다 강화회담으로 전투가 뜸해지자 의병을 해체하고 정병만을 골라 다시 군진을 정비했다.

1594년 4월 초순 진주성에 들어간 덕령은 군사들에게 둔전을 짓게 하고, 삼장사 등 7만 여명의 희생자들을 위해 스스로 제관이 돼 제사를 지냈다. 그는 “슬프고 아파라, 하늘을 우러러보니 망망하고 땅을 굽어보니 답답하다. 한 싸움 전쟁터는 만고에 의로운 땅이라, 눈물을 씻어 전을 드리고 피를 뿌려 애사를 진술한다. 병화 일어남이 어느 때인들 없으랴마는 슬프다, 우리 동방에 오늘 같은 전쟁이 어찌 또 있으랴.(후략)”라는 제문을 남겼다. 같은 해 9월 선조가 삼도체찰사 윤두수, 도원수 권율,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에게 밀지를 내려 수륙연합작전을 지시하고, 이에 따라 권율과 김덕령은 경남 고성에 집결했다. 9월 27일 덕령이 선봉에 서 총공격에 나섰으며 제1차 장문포 전투, 10월 4일 제2차 장문포 전투에서 왜적의 소굴을 점령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이후 명나라의 만류로 전투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으며, 1595년 2월 복병장 최강과 협력해 고성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 200여 명을 몰살시키고, 이어 경남 의령으로 이동해 곽재우와 함께 연합작전을 펴 왜적들을 물리쳤다.

◇삼도 임계영
1592년 7월 20일 보성 관문에 붙은 계영의 격문을 보고 1,000여 명의 장정들이 달려왔다.  66세의 박광전이 의병대장으로 추대됐으나, 건강 문제로 사양하자 임계영이 대장이 됐다. 호랑이 그림을 깃발에 매달고 8월 중순 남원에 도착한 그는 남원부사 윤안성에게 화살, 칼 등 무기와 군량을 건네받은 뒤 최경회와 첫 인사를 나눴다. 

 

용을 정비한 후 8월 20일 금산과 무주의 왜적을 키기 위해 합동작전을 준비하던 중 경상감사 김성일의 요청으로 영남 방어에 나섰다. 경남 함양을 지나 합천에서 의병장 정인홍, 김면 등과 성주성 공략에 나섰으나 1, 2차에서는 실패한 뒤 9월 중순 진주성으로 이동했다. 왜적 2만여 명이 포위한 진주성에 진군하지 못한 계영은 곽재우와 그의 선봉장 심대승, 고성현령 조응도, 최강, 정유경 등은 후방에서 왜적을 괴롭히는 역할을 했다.(1592년 11월 성주성 3차 공격과 관련 전공은 앞서 오봉 정사제와 중복돼 제외한다.) 1593년 1월 13일 계영과 최경회는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왜적 공격을 계획했으며, 1593년 3월 18일 경북 선산의 적들을 공격하기로 하고 작전회의를 가졌다. 3월 26일 성안 왜적의 보급로를 막고 4월 5일 공격을 감행해 400여 명을 사살하자 왜적은 상주와 함창 방면으로 도주했다. 

 

계영은 선산, 개녕, 성주 등의 왜적을 모두 몰아내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5월 24일 도체찰사 정철에게 보고한 뒤 6월 5일 경남 함안으로 이동했으며, 이후 진주성의 위급함을 알고 장윤에게 우선 300명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돕도록 했다. 자신은 부족한 군량과 무기를 확보해 진주성으로 가려했으나 6월 29일 함락 소식을 듣고 통곡했다. 7월 27일 경남 의령으로 이동해 진주성에서 북상하는 왜적들을 괴롭힌 뒤 12월 하동으로 진을 옮겼다.

1594년 정월 광해군의 지시로 장흥, 보성 등의 군량을 전달받은 계영은 2월 섬진강변으로 왜적을 유인해 복병으로 기습해 타격을 입힌 뒤 같은 해 4월 김덕령에게 의병을 넘겼다.

◇도탄 변사정
1592년 4월 임란이 발발할 당시 병석에 있던 변사정은 5월 13일 김천일, 이어 고경명이 각각 거병을 알려오자 남원지역 선비들에게 군량과 무기를 보내자는 편지를 발송했다. 양대복이 찾아오자 병기와 군량을 건네고 유팽로와 함께  3,0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고경명 의병에 합류하도록 했다. 남원 용성으로 돌아온 사정이 의곡청을 설치하자 순식간에 수백석의 쌀과 수천근의 쇠붙이가 모였다. 고경명에게 양곡 100석과 병기 수백 정, 김천일에게도 쌀 등을 보냈다. 

 

1592년 7월 고경명의 사망 소식을 들은 사정은 64세의 나이에 결국 거병을 결정하고 전 목사 정소, 전 현감 양사위, 참봉 양추, 진사 김득지 등과 2,000명의 의병을 모았다. 도체찰사 정철이 비장 이잠을 불러 300여 군마를 주며 사정을 돕도록 했다. 충북 옥천에서 충청도 의병장 김홍민과 합세해 상주, 선산, 개녕, 금산 등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을 공격해 1,300여 명을 사살했다. 이어 정철에게 의병에 대한 명령 계통을 단일하게 해줄 것을 요청함과 동시에 왜적의 보급선 파괴에 나섰다. 그는 충북 영동 황간에 주둔중인 왜적을 정탐한 뒤 군사를 3대로 나눠 야음을 틈타 기습해 승리했다. 1592년 12월 성주성 3차 전투에 김여중을 선봉장으로 해 500여 명을 파견하고, 권율이 군진을 수원 독산산성으로 옮기자 2000여 명을 이끌고 입성했다.

기습작전으로 밤중에 나가 싸우고 후퇴하기를 반복해 포위하고 있던 3만여 명의 왜적들을 지치게 해 퇴각시켰다. 당시 왜적이 성안으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막았을 때 그는 왜적 염탐꾼들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흰쌀로 말을 씻기며 성안에 물이 풍족함을 과시했고 서장대(西將臺)라는 누각에서 잔치까지 벌렸다. 왜적은 작전 실패를 깨닫고 막았던 물줄기를 다시 텄으며, 이후 서장대의 명칭은 세마대(洗馬臺)로 바뀌었다. 과천, 시흥에서 왜적들을 공격하며 300여 명을 사살하고, 1593년 4월 왜적이 철수를 시작하자 이들을 추격하며 남하했다. 같은 해 6월 18일 진주성에 도착했으나 군량이 부족하자 이잠과 300여 명의 정예병을 남기고 외곽에서 군량을 모아 쌀 100섬을 진주성에 보냈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1975년까지 오봉의 생가가 있었던 보성군 득량면 마천리 마동부락. 하지만 46년이 지난 뒤에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11> 의병장들의 화려한 승전의 기록 ①

의병장들은 정규 훈련을 받은 적 없고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양반, 농민 등을 이끌며, 신무기 조총을 지닌 정규군 왜적들과 맞섰다. 관군들이 피했던 전투에도 악착같이 나섰고, 유격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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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조국에 헌신한 의병장들의 고향과 가문 ③

임란 의병장들은 가문과 고향의 자랑으로, 태몽에서 설화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관련해 다양한 이야기들이 전해내려온다. 아쉽게도 이러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잊혀졌고, 그나마 남아 있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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