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준 장편소설 ‘내가 말하고 있잖아’
팬데믹이 여러 사람의 일상을 앗아간 것은 당연하지만 그중에서도 지금 청소년들에게는 더욱 큰 영향력을 미쳤을 듯하다. 가령 올해 중학교 2학년인 아이가 기억할 자신의 10대는 어떤 모습일까. 범위를 더 좁혀서, 올해 여름은 어떻게 기억될까.
전염병이 나라를 불문하여 창궐하고, 학교 수업의 비대면 영상 수업으로 대체되었으며, 여름방학은 기이하게 짧아졌는데, 거기에 기록적으로 긴 장마가 믿을 수 없게 많은 비를 오랫동안 뿌렸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디스토피아 소설의 세계관 정도로 여겨질 만한 일이 실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겐, 특히 그즈음의 청소년에게 이것은 모두 현실이다. 소설이나 영화가 아닌, 우리 앞에 실존하는 현실, 그 자체다.
정용준 장편소설 ‘내가 말하고 있잖아’의 배경은 1999년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우스운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노스트라다무스니, 밀레니엄버그니 하는 이름을 가져다 붙이며,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는 순간에 일어날 극적인 사태에 대한 두려움 혹은 갈급 들이 있었다.
주인공 ‘나’는 중학생이다. 앞자리 숫자가 바뀌는 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이미 알고, 무슨 일이든 일어날 거라 호들갑인 사람들이 우습지만, 실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에 실망하는 소년이다. 소년은 말을 더듬는다. 녹록한 상황이 아닌 엄마가 어떻게든 교정원까지 보내야 할 정도로 소년의 언어 생활은 ‘문제’가 있다. 학교에서 소년은 입을 닫아 버린 아이이고, 많은 아이들이 소년을 무시하고 괴롭힌다. 어떤 아이는 자신의 선함을 증명하기 위해 소년을 이용하기도 한다.
짧은 인생에서 여러 부침을 겪은 소년은 그래서 이렇게 다짐하는 것이다. “과거의 난 그랬다. 잘해 주기만 하면 돌멩이도 사랑하는 바보였지. 하지만 열네 살이 된 지금은 다르다.” 소년의 마음은 이토록 굳게 닫혔다. 그 마음의 문을 두드린 건 언어교정원 사람들이었다. 각기 다른 증상을 보이지만, ‘이야기하기’나 ‘소리 내어 말하기’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소년에게 손을 내민다.
이 소설에서 가장 빛나는 지점은 악의 없는 인간들의 나이를 뛰어넘는 연대를 그리는 장면이다. 소년과 가장 가까이에 있어야 할 존재들(가정에서의 보호자 혹은 학교에서의 선생님)이 아닌 상관관계가 없는 어른이 소년을 다독거릴 때, 그 사심 없는 관계에서 받는 선함의 위로가 적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나에게 잘해 준다고 하여 돌멩이라도 믿기는커녕 왜 저러는지 따지기 때문일 것이다. 왜 이러지? 나에게 무엇을 얻어 가려고 하지? 의심하면서.
그런 의심과 분노와 성찰과 고통을 소년은 글로 쓴다. 누군가 읽기에 그것은 의미 없는 낙서이거나 불량한 일기일 수도 있지만, 읽기에 따라 그것은 소설이 된다. 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교정원 사람들과의 교류와 더불어 소년은 무언가를 백지에 써서 남김으로써 언어적 심리적 장애를 극복해 간다. 일기 쓰기에서 시작된 소년의 글쓰기는 ‘나와 종이 사이 한 뼘도 안 되는 허공 속에 일렁이고 있는 문학적 표현’을 고민하는, 그러니까 소설 장르에 대한 고민으로까지 확대된다.
이 대목에서 ‘내가 말하고 있잖아’는 결핍을 지닌 소년의 성장소설이자 교양소설은 물론이고, 소설 장르에 대한 메타적 고민이 담긴 예술가 소설로까지 의미가 확장된다. 결국 소설은 자신에 대해 쓰는 것이다. 문학적 표현을 빌려, 남들이 읽을 수 있도록 무엇을 어떻게 가공할 것인가는 중요한 후작업이다.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적어도 소년의 경우에는 그렇다. 많은 작가가 그러할 것이다.
소년이 앞으로 좋은 어른이 될 것만 같은 분위기가 소설의 배경인 2000년의 왕십리를 감싼다. 소년 주위에 있던 좋은 어른이 소년을 좋은 어른이게 할 것이다. 소년을 좋은 사람이게 하는 게 하나 더 있다. 언어를 수단으로 타인과 소통하는 일에는 언제나 고통이 따른다. 그 고통을 소설로 써 왔던 정용준 작가가, 사뭇 다른 분위기의 신작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나 소설을 읽는 이는 다 알 것이다. 거기에 담긴 묵직하고 단단한 세계는 여전하다는 것을.
팬데믹을 맞이한 10대에게(그리고 모두에게) ‘내가 말하고 있잖아’를 권해 본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모습을 글로 써 보길 역시 권해 본다. 읽기를, 말하기를, 쓰기를. 그리하여 지금 여기의 공기를 제 것으로 만들기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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