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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동 고려인 마을과 환대의 도시 광주를 향한 발걸음

by 광주일보 2022.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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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가여운 타향살이
고구려 유민, 삶터전 찾아 러시아로…연해주에 가장 많이 정착
구소련 붕괴 이후 강제이주…중앙아시아로 흩어져
남북분단으로 고향길 막힌 고려인, 보따리 장사로 남한 방문

월곡동에 자리한 고려인문화관 ‘결’. <한희원 작가 제공>

미국인 화가 윌리 세일러(Willy Seiler)는 태어난 곳이 독일인데 히틀러의 전쟁에 환멸을 느낀 뒤 50여개 나라를 떠돌며 그림 작업을 했다. 한국에도 찾아왔는데, 1956년 첫 방문 이후 1960년까지 3번 방문. 총 13점의 동판 작품 ‘한국’ 연작을 남겼다. 돈을 입에 꽉 문 여인과 젖가슴을 풀어헤친 여인을 담아낸 ‘악착같은 장사’라는 작품이야말로 시리즈의 대표작. 먹고 살기 위해 악착같은 삶을 살아내는 여인들의 뜨거운 시장통 풍경. 돈이 상징하는 목숨줄은, 인간의 삶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떠밀고 끌어당기며 운명까지 뒤바꾼다.

윌리 세일러 작 ‘악착같은 장사 ’

과거 소련에선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무자비하고 무법적인 재산 몰수와 강제 이주가 흔했다. 모스크바 쪽에서 유배를 받아 시베리아 동토에 보내지기도 하고, 연해주에서 집단 이주를 당하여 중앙아시아를 채우며 생존해 나가기도 했다. 단결을 와해시켜 저항력을 무너트리고, 고분고분 말을 잘 듣게 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너른 땅을 개발하기 위해 국토 내의 소수민족을 이용한 처사였다. 소련의 공산화에 지대한 도움을 끼친 혁명가도 억울한 난도질을 당했다. 누구라도 타향살이의 고생보다 배나 가혹한 유형살이에 가까운 집단 이주를 겪어야 했다. 소련의 망할 짓은 그밖에도 부지기수였는데, 우리 고려인들에겐 말로 다 할 수 없는 비극의 시대였다.

소련이 붕괴한 후 급속한 자본주의화가 시작되자 배급에 의존하던 이들은 뱃가죽이 달라붙는 나락까지 미끄러졌다. 서울로 작은 시장이 생겨나고, 고려인들도 억척스럽게 돈을 입에 물고서 장마당에 우뚝 섰다. 과거 고구려사람, 그리고 고려사람으로 불리거나 더 이전에는 가우리(Kauli), 카레이츠라고도 불리던 동포들. 우리 겨레는 상인으로도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다. 다같이 생존 전략을 짜고, 이 ‘페레스트로이카’ 변화에 적응하여 나갔다. 고려인들은 한반도 북측과만 접촉하지 않고 88올림픽을 계기로 남측과도 만나게 된다. 그렇다고 북조선 사람도, 대한민국 사람도 아닌 ‘이주 고려인’으로 살아야 하는 운명은 변함이 없었지만, 앞서 자본주의 체제의 길을 걸어온 남한 쪽에 관심과 구미가 당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고려인은 러시아 땅 연해주에 가장 많이 살아간다. 고구려 유민들이 이미 그곳에 살고 있었다. 여기에 조선왕조 시절 가난과 기근에 결국 강을 건너갔다가 더불어 정착. 1937년엔 강제 이주로 중앙아시아 각지에 흩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그들은 모국땅을 사랑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한겨레 동포들이었다. 을사늑약 이후에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고려인 우국지사만 하더라도 무려 1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20세기 초만 해도 연해주에만 고려인 정착마을이 32개였다. 농사와 어업을 병행하면서 생활고를 해결하는 정도였으나 나라가 일본의 손에 들어가자 최재형과 안중근, 이상설과 이위종, 이범진, 홍범도, 이범윤 등이 항일의병을 이끈다. ‘나는 공산주의자이지 민족주의자가 아니다’고 했음에도 아무르 강변에서 처형을 당한 사회주의자 김알렉산드라는 비극의 시대를 건너던 잔다르크와 같았다. 속속 건설된 고려인 항일빨치산부대가 맹위를 떨쳤는데, 한창걸과 최호림이 그랬고, 만주와 연해주까지 진입한 일제가 가장 무서워했던 대장은 홍범도와 김일성 부대 등이었다.

문화관 앞에서 포즈를 취한 고려인 아이들. <한희원 작가 제공>

남북 분단은 고려인들에게 돌아갈 고향을 막아버렸다. 대한민국과 러시아의 수교 이후 고려인들은 보따리 장사로 남한을 방문하여 장사 수완을 발휘했다. 한국의 고임금에 솔깃하여 고국으로 돌아오는 이주행렬도 이어지게 된다. 그렇게 생겨난 곳 하나가 광주의 월곡동 고려인 마을. 수만명이 취업비자를 받아 우리나라에 입국했고, 이주노동자의 고달픈 삶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말이 통하지 않고, 구직 취업의 어려움이 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죽고 싶다고, 한국 땅에서 장례식을 치르겠다고 저마다 얘기한다. 야박한 자본주의하에서도 고국의 땅, 부모님이 묻힌 땅은 아랫목만큼 따뜻하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쓰던 모국어의 찰진 기억일랑 가슴속까지 쏙쏙 스며들기 때문이렷다.

2000년 국내 3D 업종의 대체 인력, 산업연수생 지원사업으로 들어온 이후 집값이 싸고 교통이 편리한 광주 월곡동에 몰려들었다. 2013년엔 전국에서 처음으로 ‘광주광역시 고려인주민 지원조례’가 제정되자 광주살이에 대한 기대감은 배나 부풀었다. 고려인은 전국에 10만명 정도가 흩어져 지내는데, 광주엔 올해 2022년 6000명 정도가 살고 있다. 새날학교라는 공립 위탁 대안학교가 있어 아이들을 내맡기고 일터에 뛰어들기 용이하다. 광주시 의사들이 이끄는 ‘고려진료소’는 4년째 운영중이며 ‘타향살이’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또 네팔 명예대사이자 의사 전성현은 이곳에 ‘고려의원’을 올해 개업하여 보이지 않는 선행을 많이 베풀고 있다. 고려인들은 하남 산단, 평동 공단 등 공장 일자리와 장성, 담양 등 가까운 거리의 농촌에 일자리를 갖고 있다.

언젠가 러시아땅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재형과 홍범도의 독립운동 현장에 다녀온 일이 있었다. 그때 동행이었던 고려의원 병원장 전성현 형도 뵙고, 고려인들의 음식문화도 느낄 겸 이 거리를 찾아갔다. 식당을 겸한 ‘고려가족카페’에서 점심을 들었는데, 마침 그날이 여사장 텐 올가의 딸 돌잔치였다. 거한 잔치상이 한쪽에 차려져 있었는데, 고사리며 나물 반찬이 놓인 게 신기했다. 동포가 정말 맞구나 맞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오는 고려인 커뮤니티의 다정함도 요샌 국내에서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친척도 아니면서 찾아와 축복해주었다.

고려인들의 주식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쌀로 지은 밥이다. 여기에 시락장물이(시래기 된장국), 디비(두부)를 좋아한다. 국시(국수)도 사랑하는데 배고재(만두)도 중국이나 북한 사람들만큼 좋아한다. 된자이(된장), 지러이(간장), 고추자이(고추장)을 기본 양념으로 쓰고 아기를 낳으면 산모에게 미역국을 끓여 먹인다. 여기에 소련땅 음식이었을 샤슬락(양고기 꼬치구이)과 플로브(볶음밥), 돌처럼 딱딱한 흑빵도 즐긴다. 상추쌈도 좋아하는데, 상추를 불르불르라 부른다. 상추와 된장과 밥이면 고기가 없이도 살 수 있는 게 고려인. 고기가 주식인 러시아 땅에서 식물 음식을 절여설랑 밑반찬을 삼았다는 사실도 놀라운 일이다.

유라시아 고려인의 정착촌, 이주민들과 함께 가는 광주. 슬로건 같은 이 말이 월곡에 가보면 현실로 와륵 밀려든다. 그들이 찾는 식료품 가게엔 북쪽 나라 북국의 사랑하는 술 보드카가 종류별로 차려져 있다. 러시아 속담에 40리쯤 길이 아니고, 40년은 세월도 아니고, 40도는 술도 아니라는 말이 있는데, 40도 이상 되어야 술 축에 끼워주겠다는 으름장. 보드카는 무색무취, 하지만 한없는 따뜻함과 흥을 감추고 있다. 추운 날 먼길을 걸어온 친구에게 보드카 한잔을 따라주고 몸을 녹이라 이른다. 자작나무가 베어져 죽지 않으려고 새하얀 목피를 두르고 있으면서 폭설과 한 몸이 되던 날. 눈 쌓인 길을 걸어온 아무르 강변의 사냥꾼은 청어 한 토막과 보드카 한잔, 흑빵을 우걱우걱 씹어먹으면서 캄캄한 밤을 지샜을 것이다. 동무하여 사냥총을 닦던 고려인 사냥꾼은 김치를 그리워하고, 맵고 짠 김치가 있는 집으로 어서 돌아가길 바랬을 것이다.

할아버지대에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한 고려인 3세 시인 ‘리 스따니슬라브’의 시는 읽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때린다.

“우리말 이름은 없어졌다.
우리의 짧은 성씨만 남았다.
그러나 옛날부터 우리의
매운 음식은 남아 있다.
할아버지에게 옛날 사신 얘길 여쭸더니
도무지 침묵 뿐 대답이 없으시다.”

매운 음식과 할아버지의 침묵이란 말에 눈물이 핑 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차마 지난 시절의 애환과 아픔을 어린 손주에게 꺼내놓진 못하고, 속으로 아마 울었을 것이다. 많이 울어서 ‘울가’인데 우리는 ‘올가’라 쓰는 걸까. 구소련부터 흔한 이름 올가.

다가구주택 옥상 베란다. 월곡동 이주민들이 다닥다닥 붙어사는 살림집. 색종이처럼 접힌 빨래들과 저녁밥을 차리면서 놓아둔 수저통에 뾰족한 포크들이 더 많이 담긴 이색 풍경. 물류센터의 컨베이어 벨트에 손가락을 잘려 잃고, 거기다가 일자리까지 잘려 잃은 노동자 고려인이 국밥집에서 나온다. 더 갈 곳 없는 그에게 그나마 단 한 곳 갈 곳은 이제 집뿐이다. 월곡동은 누군가의 소중한 집이면서 ‘남은 곳’이다. 자본의 남은 개발지가 아니라 먼 타국에서 찾아온 고려인 동포들이 자리 잡고 살아가는 ‘남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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