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애호가들의 안식처, 추억의 공간
법정 스님 흔적 찾기, 레트로 여행자 발길
4일, 고객들이 기획한 ‘기념음악회’ 개최
“참 좋다.”
창밖으로 보이는 무등산, 바이올린으로 연주되는 생상스의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따스한 햇빛이 쏟아지는 창가, 그리고 커피 한잔. 지난 31일 취재를 위해 오랜만에 클래식음악감상실 ‘베토벤’에 들렀다 새삼스레 든 생각이다. 베토벤은 흰 눈이 쏟아지는 날, 비가 오는 날 어느 때 찾아도 좋고, 6층에서 내려다보이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야경과 5·18 민주광장의 활기찬 모습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광주의 클래식 음악 감상실 ‘베토벤’이 올해로 마흔 살이 됐다. 1970∼80년대만 해도 충장로에는 클래식음악감상실이 많았다. ‘비엔나 음악감상실’, ‘필하모니’, ‘고전’ 등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던 감상실은 모두 오래 전에 자취를 감췄고, 그래서 ‘베토벤’의 존재가 더 소중하다.
베토벤은 이곳에서 추억을 쌓았던 모두가 함께 지켜간 공간이다. 집세를 감당하지 못해 폐업을 고민하던 2007년 ‘음악감상실 베토벤을 살리기 위한 모임’이 만들어져 위기를 면했다. 30주년이었던 지난 2012년에는 고객들이 힘을 모아 기념음악회를 열었다. 올해도 베토벤을 아끼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40주년 기념음악회-Andante로 세상을 살다, 언어 이전의 떨림’이 오는 4일 오후 4시 열릴 예정이다.
‘소중한 공간’은 모두가 알아보는 법이다. 베토벤에서 추억을 쌓았던 이들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시대의 어른이었던 법정스님의 흔적을 찾아, 음악실 순례 등 레트로 감성을 만나러 오는 전국 여행자들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베토벤’의 출발은 1982년이다. 뉴욕으로 이민 간 김종성씨가 YMCA 뒷골목 현 등촌 샤브샤브 건물 4층에 문을 연 게 시작이었다. 지금 자리(광주시 동구 금남로 1가 19-6 금향빌딩 6층)로 이사한 건 1987년. 현재 사장 이정옥(67)씨는 초창기 단골 손님이었다.
40여년이 지났지만 베토벤은 예전 모습 그대로다.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기분좋은 나무바닥과 오래된 탁자, 누군가의 낙서가 적힌 붉은 벽돌, 베토벤의 데드마스크, 카라얀의 사진 등등. 이 씨는 커튼을 세 번 바꾸고, 의자 천갈이를 네 차례 진행한 것 이외에는 크게 변한 게 없다고 했다.
사람들과 함께 한 시간이 많다 보니 그만큼 사연도, 추억도 많다. 법정 스님은 오래 전 광주우체국에 다니러 가실 때면 가끔 들러 음악을 듣곤 했다. 지금 베토벤에는 덕조 스님이 찍은 법정스님의 흑백사진이 걸려 있다. “입안에 말이 적고, 마음에 일이 적고, 뱃속에 밥이 적어야한다. 이 세 가지 적은 것이 있으면 신선도 될 수 있다.” 법정 스님이 직접 써 준 글귀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조용히 음악을 듣는다. 베토벤은 다큐멘터리 ‘법정 스님의 의자’에 등장한 덕에 스님을 기억하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낯선 사람까지도 금방 벗이 되는… 음악으로 가득한 집’이라는 글귀를 남겨준 이해인 수녀는 언젠가 베토벤에서 전교생이 30명 뿐인 강진 성전중학생들에게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소설가 윤대녕의 산문집 ‘그녀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것들’(문학동네)에도 베토벤은 등장하고, 시인 류시화는 르 끌레지오의 글귀를 적은 엽서를 ‘정옥 누님’ 앞으로 보내기도 했다.
‘베에토벤 小史’라 적힌 검은색 파일 속에 담긴 건 이 씨가 “아주 많이 나이가 들면 혼자 두고두고 읽고 싶어” 모아둔 편지와 엽서, 기사들이다. 1995년 베토벤을 찾았던 대성여고 3학년 혜미와 미성이. 두 소녀는 ‘베토벤을 만난 걸 길지 않은 제 생에 있어 손꼽을 만한 행운’이라 믿었고 ‘나이가 들면 둘이서 베토벤같은 멋진 음악감상실을 하고싶다’고 적었다.
‘비창’과 ‘열정’을 들으며 밖을 한참 내다보던 일본 시인 나스 마사노부는 ‘소나타가 흐르는 베토벤’이라는 시구가 등장하는 시 ‘여기가 진혼의 증거다’를 항공우편으로 보내오기도 했다.
베토벤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는 수십년간 음악강좌를 진행하고 있는 안철씨다. 현재는 ‘오페라 감상’(수·오전 10시 15분), ‘고전음악감상’(토·오후 2시30분)을 운영중이다. 이 씨는 “언제나 한결같으신 안 선생님이야말로 베토벤의 구심점이자 멘토”라며 고마움을 전했다.
4일 열리는 음악회는 고객들이 기획하고 참여했다. 이상열씨는 첼로와 플루트로 ‘자클린의 눈물’과 ‘베니스의 축제 변주곡’등을 연주하고 서만재 기타리스트는 ‘아랑훼즈협주곡’과 ‘토카타’를 들려준다. 또 손은찬(살레시오초 5년)군은 바이올린 연주 ‘Memory’ ‘Way Back Home’를 선사하며 30주년 때도 참여했던 바이올리니스트 양새미씨가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등을 들려준다. 이어 안철씨가 음악감상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베토벤을 오래 알고 계신 분이나, 처음 오시는 분이나 절대 아무것도 바꾸지 말라고 말씀하셔요. 마루바닥과 붉은 벽돌 등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참 좋아하시죠. 제 자신부터가 이곳에 오면 마음이 평온해져요. 음악의 힘이라고나 할까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문을 열고 싶습니다.”
이 씨는 “영혼이 순수하고 맑으신 분들이 감상실을 찾아주시기에 지금까지 이 자리를 지켜왔다”며 “갑작스레 고객들이 준비해준 이번 기념 음악회도 그렇고, 정말 복이 많은 것같다”고 말했다.
/글·사진=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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