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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재기자

“전두환은 역사의 수치 … 누구든 와서 뺨이라도 한 대 치시라”

by 광주일보 2020.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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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포획상’ 제작한 파주 정한봄 씨]
‘1980년 광주’라는 아픈 역사, 침묵하고 방조했던 부채의식이 계기 양형규 작가와 우여곡절 끝 제작
시민 응어리 풀고 위로하고 싶어...광주 5·18 행사 때 시내서 조리 돌림...全씨 반성하고 역사 교훈 됐으면

 

5·18유족이 27일 광주지법 정문 앞에 설치된 전두환 포획동상을 때리고 있다. 사자명예훼손 혐의를 받고 있는 전두환은 이날 재판을 받기 위해 광주지법에 출두했다. /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지난해 12월 광화문 광장에 설치돼 있었던 ‘전두환 포획상’이 광주지방법원에 나타났다. 27일 전두환이 광주지법에 출석함에 따라 자리를 옮긴 것이다.

동상을 제작한 이는 파주에서 거주중인 정한봄(65·사진)씨. 그는 “지난해 12·12사태 40년을 맞아 김태동 교수, 류현선 작가와 뜻을 모아 제작했다”고 말했다. 1980년 광주라는 아픈 기억을 만들었던 전두환 정권 당시, 전국이 침묵하고 방조했던 그 시절 함께하지 못한 안타까움과 부채의식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전두환은 저지른 악행에 비해 사회적·법적으로 합당한 응징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어요. 한 때 군인이자 국가 최고 권력자였던 사람 답지 않게 사실을 부인·왜곡하고 숨어 지내는 추한 모습으로 일관했습니다. 이런 이와 함께 산다는 게 수치스러웠어요. 이 동상을 통해서라도 못 다 푼 분노를 표현하고, 당시 시민들에게 작은 위로가 됐으면 하는 마음이었지요.”

동상을 만들기까지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가장 어려웠던 건 작가를 섭외하는 일이었다. 12월 설치를 목표로 지난해 6월부터 작가 섭외를 시작했으나, 10월이 돼서야 빠듯하게 동상을 완성할 수 있었다.

“5곳의 공방에서 퇴짜를 맞았지요. 취지에 공감하고 참여한다고 했던 작가들도 일주일쯤 지나면 못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혹시 해로운 일을 당할까 하는 걱정에 주변에서 반대가 많았던 모양이에요. 6번째로 양형규 작가를 찾아 마침내 동상 제작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동상은 군사반란을 암시하는 군복을 입고 있고, 소장(보안사령관) 계급장을 달고 있다. 가슴에는 전두환 명찰과 함께 1996년 사형 선고를 받을 당시 수인번호(죄수번호)를 달고 있다. 동상은 무릎을 꿇고, 포승줄에 묶인 채 쇠창살에 갇힌 형상이다. 쇠창살은 열 수 있게 돼 있다. 정씨는 “시민의 분노를 마음껏 표현하라는 의미에서 쇠창살 전면을 개방했다. 누구나 와서 뺨이라도 한 대 때릴 수 있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동상이 광화문 광장에 놓이자, ‘구속상’, ‘치욕상’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며 큰 관심을 모았다. 정씨는 ‘포획상’이라는 이름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자취를 감추고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전두환을 끌어낸다는 의미다.

지난해 시민은 동상에 주먹질과 발길질을 쏟아냈고, 2주만에 머리 부분이 부서지는 바람에 접착제로 긴급 수리를 하기도 했다. “석고에 FRP(유리섬유 강화플라스틱)를 덧씌워 만들었는데, 그리 쉽게 깨지는 재질이 아니다. 소화기나 각목 등으로 내리치는 사람도 있어 생각보다 많이 훼손됐다”고 한다.

“산 사람 형상을 만들어 응징한다는 게 좋은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렇게라도 시민들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게 ‘통렬’했습니다.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응징이었지만, 짜릿한 순간이었지요.”

동상은 지난 3월 4일 광화문에서 철수한 뒤, 한달 동안 보수를 거쳐 광주에 도착했다. 양형규 작가가 원형대로 보수했고, 파손 위험이 적은 뿅망치를 함께 비치해 두었다.

동상에는 전두환의 악행을 기록한 동판도 추가됐다. 정씨는 “원래 목에 걸어 둘 생각이었으나, 악행이 너무 많아 동판 하나에 담을 수 없었다. 2개의 팻말에 나눠 적어 동상 양 측면에 붙여 두었다”고 말했다.

동상은 27일 재판 이후 다시 광화문으로 옮겨질 예정이었으나, 5·18 40주년 행사가 코로나19 여파로 취소되면서 한동안 광주에 더 머물 계획이다. 죄인을 압송하는 수레를 만들어 동상을 앉혀 광주 시내에서 ‘조리 돌림’ 순회를 하는 등 5·18 행사에 활용될 예정이다.

“동상을 제작한 가장 큰 목적은, 시민의 분노를 전두환 본인이 알게하는 것입니다. 전두환과 5·18민주화운동은 광주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의 문제입니다. 전두환이 저지른 악행을 반성하고, 우리 후손에게 역사적 교훈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유연재 기자 yjyou@kwangju.co.kr

 

 

 

“전두환은 역사의 수치 … 누구든 와서 뺨이라도 한 대 치시라”

지난해 12월 광화문 광장에 설치돼 있었던 ‘전두환 포획상’이 광주지방법원에 나타났다. 27일 전두환이 광주지법에 출석함에 따라 자리를 옮긴 것이다.동상을 제작한 이는 파주에서 거주중인 정한봄(65)씨. 그는 “지난해 12·12사태 40년을 맞아 김태동 교수, 류현선 작가와 뜻을 모아 제작했다”고 말했다. 1980년 광주라는 아픈 기억을 만들었던 전두환 정권 당시, 전국이 침묵하고 방조했던 그 시절 함께하지 못한 안타까움과 부채의식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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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89)씨는 또 헬기 사격이 없었으며 고(故)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하지도 않았다며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전씨는 재판 진행중에도 1년 전과 마찬가지로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또다시 보여줬다. 광주지법 형사 8단독 김정훈 부장판사는 27일 오후 1시 57분부터 광주지법 201호 형사대법정에서 사자명예훼손혐의로 기소된 전씨에 대한 공판기일을 진행했다. 전씨는 청각 보조장치를 착용하고 재판에 참여했다. 전씨는 “잘 들리느냐”는 판사의 질문에 고개를 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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