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출신 동학농민군 편지’발굴 문화재 등록 견인
양반 신분으로 혁명 참여…1894년 동생에게 쓴 한문 서한
“우리 문화·역사 자료 발굴 최선…많은 분들과 공유하고파”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들이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들고 봉기한 농민 중심의 민중항쟁이었다. 이후 의병항쟁은 물론 3·1독립운동, 근대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 참여했던 농민군이 작성한 문서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반란군으로 몰려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하거나 이후 사회 진출 과정에서 불이익을 당했기 때문에 문서들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최근 나주 출신 양반가 자제의 ‘동학농민군 편지’가 국가등록문화재에 등록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1894년 11월께 유광화(1858~1894)가 아우 광팔에게 보낸 한문 서한이 그것. 이 편지는 동학농민군에 참여한 인물 가운데 양반가 자제도 있었고, 이들이 군자금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이 편지를 발굴하고 국가등록문화재에 등록할 수 있는 계기를 준 학예사가 있다. 지난 2016년 12월부터 2020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기념재단) 학예사로 근무한 정명광 학예사(전북 교육청 정책공보관실 교육박물관설립팀)가 주인공이다.
“지난 2019년 기념재단에서 동학 농민군 관련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관련 자료를 수집하다가 ‘유광화 편지’ 실체를 알게 됐습니다. 지금은 퇴임하신 전남대 사학과 이상식 교수님이 펴낸 자료집에 두 개의 편지가 언급돼 있었거든요. 그 가운데 하나가 ‘유광화 편지’였습니다.”
정 학예사는 복사본 형태의 흑백사진을 보는 순간, “국가등록문화재가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밝혔다.
1994년 동학운동 100주년을 전후로 역사학계에서는 동학혁명으로 격상해야 하는 것은 물론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다양한 사료를 발굴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와 같은 연장선에서 “그 편지 또한 자료집에 수록된 것 같다”는 게 정 학예사의 생각이었다. 편지는 1894년에 쓰여진 것으로 확인됐다.
전시에 실물 편지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실체를 찾고싶다는 각오로 이어졌다. “다들 찾기 어려울 것이다. 시간도 많이 지난 데다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서는 동학 참여자의 후손이라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들이 많다”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럴수록 정 학예사는 유족을 만나 편지 실체를 확인하고 싶었다. 이상식 교수와 연락이 됐고, 그렇게해서 광주에서 유광화의 손자 유길홍(작고)의 부인 김순덕 여사를 함께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당시 여사님께 자료 관련 말씀을 드렸더니 흔쾌히 취지에 공감하셨다”며 “저희의 연락을 받고 ‘책상과 책장을 꼼꼼히 살폈는데, 구석진 곳에 꽂힌 책갈피에서 편지를 발견했다’”며 전후 과정을 설명했다.
이후 기증유물평가위원회 평가 결과 편지 원문이 맞고, 1894년 기록물이 맞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기념재단에서는 올해 상반기 국가문화재 등록신청을 했으며 그 결과 지난 7월 최종 등록문화재로 결정됐다.
편지 주인공 유광화는 나주 다도 출신으로 통정대부를 역임한 유몽렬의 아들이다. 광화는 그의 자(子)이며 본명은 유재희이며 호는 죽산(竹山)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양반 신분임에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해 나라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애국정신을 견지했다. 당시 그에게는 5살 아들과 갓 태어난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휘하에는 700명의 농민군이 있었으며 그는 군사물자를 조달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등록조사보고서 의견에는 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가 적시돼 있다.
“자신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으니 동생에게 군자금을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등, 편지 내용을 통해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들의 처지, 농민군 지도자들의 의식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의 급박했던 전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공주 우금치에서 패한 농민군은 이후 해산됐으며, 1894년 12월 1일 최경선은 농민군을 이끌고 화순 동복으로 갔으나 대부분 체포, 사살되거나 나주로 이송됐다. 이 과정에서 유광화도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광화가 동생에게 편지를 보낸 시점은 1894년 11월쯤으로 가늠된다.
한편 군산 출신인 정 학예사는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후 박사과정을 공부했다. 지난 2007년부터 박물관 관련 업무 등을 담당하고 있다.
“좋아하는 역사를 공부해 직업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문화, 역사와 관련된 자료 등을 수집, 연구해 많은 분들과 그 가치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박성천기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감과 치유’ ACC 월드뮤직페스티벌 (0) | 2021.08.11 |
---|---|
AI는 마음을 치유할 수 있을까? (0) | 2021.08.10 |
광주성악콩쿠르 1차 예선 44명 통과 (0) | 2021.08.09 |
광주 출신 장은진 작가 “소설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못된 사람” (0) | 2021.08.09 |
팔리는 브랜드, 문화에 초점을 맞춰라 (0) | 2021.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