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숲길 품은 ‘호국의 성지’…서산대사 충의 면면히
“만세토록 삼재가 들지 않는 곳”
서산대사, 임란당시 팔도도총섭 맡아
누란의 위기에 빠진 조선 구해
묘향산 원적암서 마지막 설법
제자 사명당, 스승 유골 보현사 안치
대흥사, 2014년부터 서산대제 열어
해남 대흥사는 서산대사의 충혼이 깃든 천년고찰로, 이곳에선 지난 2012년 서산대제를 재현한 이후 매년 향례가 펼쳐진다.
남쪽에 여름이 오고 있다. 해남의 여름은 초록이다. 눈길 닿는 곳, 발길 닿는 곳이 모두 푸르다. 두륜봉을 타고 올망졸망 어깨를 펼친 봉우리들마다 생명의 빛이 가득하다. 두륜봉 골짜기가 속한 곳은 삼산면 구림리(九林里) 장춘동(長春洞)이라 일컫는다. 아홉 개의 숲과, 긴 봄을 뜻하는데, 그 봄의 끝자락과 여름의 첫머리가 닿는 이즈음의 풍광은 푸르름천지다.
대흥사 숲길은 천년 숲길로 불린다. 숲길은 사시사철 다른 색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자연의 옷차림은 인위의 그것이 완벽하게 배제된 천연의 색이다. 봄의 싱그러움, 여름의 풍요, 가을의 정취, 겨울의 설경은 이곳을 거닐어 본 사람만 느낄 수 있다.
천년 숲길에 들어설 때면 부지불식간에 마음이 가라앉는다. 저잣거리의 이런저런 생각들을 내려놓는다. 내려놓고 다시 내려놓아야 숲길의 오묘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숲에 들어서는 이들은 한낱 삿된 망상을 버려야 하리. 빽빽이 들어선 나무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마음 한자리에 드리워져 있는 지난날의 희로애락애욕정, 모든 감정은 털어야 한다.
“버려라. 버려라. 또 버려라. 버리고 버려 버린다는 생각마저도 버려야 하리. 한 조각의 구름처럼, 한 물결의 파도처럼 일어섰다 스러지는 모든 상념의 흔적마저 잊어버려라.”
숲길의 느티나무, 소나무, 벚나무가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숲은 그렇게 속삭인다. 한줄기 바람마저 그것은 무언의 속삭임으로 들려온다. 세상의 여러 일들에 흔들리고, 치이고, 무너져도 그것은 이편의 뜻이 아니었느니, 가볍게 담담한 미소로 흘려버릴 일이다.
그렇게 숲길을 걷는다. 햇살이 차단된 그늘은 아늑하고 상쾌하다. 뭇 생명들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들리는 것 같다. 사람들의 소리와는 다른 자연의 소리에 그렇게 마음의 귀가 열린다.
대흥사에는 자연의 소리와 함께 옛 고승이 바람결에 들려주는 소리가 있다. 해남 대흥사하면 떠올려지는 인물이 바로 서산대사(1520~1604)다. 일찍이 서산대사는 이곳 대흥사 자리를 이렇게 말했다. ‘삼재가 들어오지 않고 만세토록 파괴되지 않는다’고.
“삶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흩어짐이라/ 떠도는 구름은 실체가 없는 것이거늘/ 삶과 죽음 가고 오는 것 또한 그러하다.”
서산대사가 열반에 들면서 읊었던 시다. 임종에 이르러 깨달은 진실은 냉철하면서도 아련하다.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이 바로 구도에 이르는 찰나다.
서산대사의 임종게는 허무와 염세가 아닌 비움과 구도에 대한 지향이다. 아주 짧은 순간 서산대사는 삶의 여정을 한마디로 그렇게 설파한 것이다. 아귀다툼과도 같은 사바의 세상에서 그의 말은 한줄기 빛처럼 다가온다.
서산대사의 임종게를 몇 번 읊조리다 보니 경내에 들어와 있다. 뛰어난 유물과 유적이 많지만 대흥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 총본영이 있던 사찰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서산대사는 왕의 특명으로 팔도도총섭(八道都總攝)을 맡아 승병을 모집한다. 서산대사는 각처에 법제자들이 많았다. 유정(惟政), 처영(處英) 등 문도만 수백 명에 이르렀다.
73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서산대사는 구국참전의 글을 띄운다. 고매한 고승대덕의 글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사뭇 다른 격정이 담겨 있다.
‘잔인무도한 왜적의 침략으로 우리 강토는 짓밟히고 부모형제는 무참히 유린당했다. 도륙의 참상은 차마 발설할 수 없을 만큼 목불경이다. 종묘사직은 훼손됐으며 사찰은 불타고 승려들도 극악무도한 적들에게 처참히 만행을 당했다.’
서산대사는 자신을 희생함으로 도탄에 빠진 민족의 운명을 구하리라 결의한다. “승려들은 주저 없이 떨쳐 일어나 보국진충(保國盡忠)하라.”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그는 모든 걸 내려놓고 분연히 일어섰다.
서산대사는 부처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열반경’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불법을 수호하는 사람은 칼과 활을 들고 불교 교단을 지키고 수행자를 수호해야 하느니 이는 결코 파계가 아니다.”
서산대사의 충혼은 누란의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한다. 당시 수군의 이순신과 승병을 결집한 서산대사가 있어 조선은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당시 승병들에 대한 활약상이 기록돼 있다.
‘승군은 접전에서 나름의 전과를 올렸다. 경비를 잘하고 역사(役事)를 부지런히 했으며 흩어지는 일이 없었다. 여러 부분에서 백성들은 그들을 믿고 의지했다.”
서산대사는 전쟁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도총섭 직위를 수제자인 사명대사에게 물려주고는 묘향산 원적암으로 향한다. 그리고는 불도를 닦으며 마지막 세상과의 작별을 준비한다.
대흥사에는 서산대사 의발이 보관돼 있다.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요, 만세토록 파괴됨이 없는 곳’이라는 장소성과 연관이 있다. 서산대사는 묘향산 원적암에서 마지막 설법을 하고는 애제자 사명당과 처영스님에게 “의발(衣鉢)을 대둔산에 전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좌탈입망(座脫入亡)의 경지에 들어선다.
이후 제자인 사명당은 스승의 유골을 수습해 묘향산 보현사에 안치했다. 대흥사에서는 지난 2012년 고증을 거쳐 서산대제를 재현했다. 조선시대부터 지내온 국가제향은 그의 공훈을 기억하기 위해 치러졌다 한다. 정조는 사액사당으로 대흥사 내 표충사와 묘향산 보현사 내 수충사를 건립한다. 2014년 4월 대흥사 경내에서 봉행된 ‘탄신 제 492주년 호국대성사 서산대제’는 신도 등 3000여 명이 동참해 서산대사의 충혼을 되새겼다. 그렇게 오늘의 우리는 서산대사에게 진 빚이 많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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