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웅미술관 디아스포라작가전 ‘김석출-두드리는 기억’
5월26일까지 회화·삽화 등 총 106점 출품…29일 개막식
“항상 나의 나라, 나의 조국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습니다. 물론 재일작가로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견지했어요.”
재일작가 김석출(75). 그는 1949년 일본 기후현에서 태어나 1955년 오사카 사카이시로 이주해 현재까지 그곳에 거주하고 있다. 부모는 경북 군위군 출신이다. 1939년 징용공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그의 부모는 1945년 해방을 맞아 조국으로 귀국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정웅미술관에서 열리는 디아스포라작가전에서 김 작가를 만났다. 오는 5월 26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 주제는 ‘김석출-두드리는 기억’.(개막식은 29일 오후 4시)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일반적인 작가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작은 체구에 선한 인상이 이웃집 할아버지 느낌이었다. 그러나 유해 보이는 인상 이면에 디아스포라 작가로 살아야 했던 고단함 등이 묻어났다.
시대의 격랑에 휘말려 일본으로 올 수밖에 없었던 그의 아버지는 작가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다. 그의 형제자매는 9남매였지만 부모가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두 딸은 고향에 남겨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
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홀어머니는 일본에서 7남매를 건사해야 했다.
그는 “어머니가 함바집 등을 하며 어렵게 돈을 벌었지만 일본말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갖은 모욕과 멸시를 당했다”며 “나 또한 기후현 탄광에서 2년 정도 일했지만 제대로 임금을 받지 못해 가난에 시달렸다”고 했다.
이번 전시에는 회화 57점, 삽화 48점 등 총 105점이 출품됐다. 그의 삶과 예술을 엿볼 수 있는 아카이브 자료 100여 점도 비치돼 있다.
김희랑 하정웅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는 국내에서 개최되는 김석출의 첫 개인전이자 전 생애를 아우르는 첫 회고전”이라며 “지난해 9월 준비를 시작해 오늘 개막하기까지 번역 작업 등 지난한 과정이 있었다”고 말했다.
현재 광주시립미술관(관장 김준기)에는 지난 2003년 하정웅(광주시립미술명예관장)의 기증으로 김 작가 작품 ‘5월 광주’ 시리즈 34점이 소장돼 있다. 이번 전시에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주제로 한 하정웅컬렉션 34점을 비롯해 일본에서 운송해 온 그의 초기작품, 3·1운동 ‘유관순’ 연작 등이 나와 있다. 또한 통일 염원을 담은 최근작 등도 포함돼 있어 예술세계를 다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전시는 ‘재일디아스포라, 김석출의 생애’, ‘미술에 입문과 재일의 인권’, ‘광주의 기억’, ‘되돌아보는 유관순’, ‘과거와 현재를 잇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청년기는 디아스포라로서 겪었던 차별과 재일의 인권, 북송선 문제, 베트남 전쟁 등을 다뤘다. 18세인 1966년 오사카시립미술연구소에서 회화기법을 습득했던 작가는 당시 재일 1세대 작가들처럼 인권문제와 조국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재일의 인권을 향해’, ‘서울의 하늘’ 등이 그러한 작품이다.
“조선반도가 남으로 분단되고 재일동포들도 ‘북이다’, ‘남이다’ 하고 싸움이 끝나지 않는 나날이었습니다. 재일동포들이 놓여 있는 현실과 일본 사회 속에서 차별과 멸시에 고민하며 ‘왜 나는 일본에서 태어났을까’하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어요.”
이후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접한 뒤 예술가로서의 본분을 생각하게 된다. 20여 년에 걸쳐 ‘5월 광주’ 시리즈 작업에 매진하게 된 이유다.
그는 “화가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 그림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며 “학생들이 계엄군에게 맞아 죽어가는 모습, 철사로 손목을 뒤로 묶여 연행당하는 모습이 매일 TV뉴스로 방송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이 일본에서 사는 현실과 광주시민에 대한 애처로운 심정, 광주의 그 부조리한 현상에 대한 분노가 중첩됐다”며 “‘지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화가의 길을 포기하려고 했으나 나는 화가로서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고 덧붙였다.
광주의 청년들이 포승줄에 묶여 죄인처럼 끌려가는 모습을 담은 ‘1980.5.27’은 신문과 TV에 보도되면서 재일동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00년대 들어서부터는 ‘유관순’ 연작을 비롯해 재일디아스포라의 고뇌, 분단조국의 화합을 염원하는 그림을 그렸다. “유관순을 그리게 된 것은 1993년 동화책 ‘조선의 잔다르크:유관순’을 그리면서였는데” 생가, 이화여대, 서대문형무소, 전쟁기념관 등을 취재했다.
험한 세월을 살아왔지만 김 작가의 작품은 투쟁과 구호 등 선전, 선동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아카데믹하고 유하며 깊이가 있다. 내면에서 충분히 숙성을 하고 예술적 승화를 도모했다는 방증이다.
한편 김준기 시립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는 재일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5·18, 3·1절 등 역사의식을 견지해왔던 김석출 작가의 ‘의미있는 기억’을 조명한다는 데 있다”며 “다가오는 3·1절을 맞아 독립운동 역사의 숭고함을 생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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